▲ 강태순 (변호사)
[경인일보=]부장검사를 마지막으로 공직을 그만두고 변호사 업무를 한지도 벌써 1년이 넘어섰다. 그 동안 우리 사무실의 직원들과 주위의 도움으로 무난하게 적응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선 감사한 마음뿐이다.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지만 어떤 분야인들 그렇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면서 지금도 열심히 변호사 업무를 하고 있다.

변호사 업무를 시작한 후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변호사로 있는 것이 검사로 있을 때보다 좋은 점이 무엇이냐'라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진담반 농담반으로 우선 와이프가 돈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과 부모님에게 용돈을 넉넉하게 보내드릴 수 있는 것이 제일 좋다고 답하곤 하였다. 그리고 또 무엇이 좋으냐고 물으면 검사로 있을 때보다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것이라고 답하곤 하였다. 반대로 변호사가 되어 나쁜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머릿속에 항상 근심거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과 가끔은 자존심을 버려야할 때도 있다는 것을 말하곤 하였다.

하지만 20년 이상 검사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1년 넘게 변호사를 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선과 악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확실한 가치관에 따라서 어떤 사건에 대하여 결정을 해야 하는 검사와 판사가 한쪽에 있고, 완전히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건당사자들이 한쪽에 있어, 변호사는 그 중간에 서서 양쪽의 생각을 듣게 되는데, 이럴 때마다 어느 것이 선(善)인지 고민스러운 경우가 종종 발생하곤 하였다. 판사와 검사의 결정이 틀렸다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얼마 전에 법정 스님이 열반하셨을 때 다른 사람들처럼 필자도 진한 감동과 많은 깨달음을 느꼈다. 특히 지금도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말은 '제가 다하지 못한 설법은 봄에 새로이 피어나는 새싹들의 침묵 속에서 듣기 바란다'는 말이었다. 듣는 순간부터 강한 충격을 받았던 이 말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과 연결되면서 그 동안의 고민을 이렇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새싹들의 침묵에서 듣게 될 설법은 '삶'이 아닐까? 어떤 경우라도 '삶'은 최고의 가치이며, 그 삶을 존중하고 지키는 것이 결국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므로 '삶'을 존중하는 것이 선이라면 '삶'을 부정하는 것은 악(惡)이 되는 것이 아닐까?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을 아름답게 생각하거나 많은 시련을 겪고 결국 자신이 추구하였던 결과를 이루는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도 결국 이 때문이 아닐까?

자신의 삶만을 강하게 주장하는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삶을 부정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하여 많은 분쟁들이 발생하지만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의 삶을 부정할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법정 스님이 설법하시고 스스로 실천하신 '무소유'가 진한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들의 행동 동기는 결국 자기 보존 본능에 따른 것이라는 생각을 앞선 칼럼에서 표현한 적이 있었지만 그 본능을 다른 사람의 삶도 존중하는 방향으로 펼쳐 나가는 것이 선이며, 인간 문명의 발전 방향과도 일치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20년 동안 검사생활을 하면서 혹시 명성을 높이거나 인사상의 이익을 위한 동기에서 수사를 하여 다른 사람의 삶을 부정한 적이 없는지 하는 후회가 되기도 하였다. 사건 당사자들은 자신의 삶 자체가 부정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진실을 모두 털어놓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노력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다만 검사와 판사들은 겨울의 추운 날씨가 새로운 봄날 새싹의 생명력을 더욱 강하게 북돋울 수 있다는 애정을 가지고 사건을 대한다면 법조에 대한 신뢰도 더 쌓여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무소유' 책에서 따온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라는 족자가 지금도 필자를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