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진현 (인천민예총 정책위원장)
[경인일보=]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다. 양복이 필요하다고 하면 좋은 양복점을 찾아가 맞춰 입는 것이 으뜸이었다. 양복 안쪽에는 '신신라사'니 '황태자'니 양복점 상호가 멋들어지게 박혀있었다. 옷을 만들자면 시간이 필요했다. 최소 두 번은 양복점을 방문해야 한다. 처음에는 기본 치수를 재고 이에 따라 임시 바느질, 가봉이 되면 다시 가서 입어본다. 가봉된 옷을 입어보고 품이 잘 맞는지, 불편하게 끼는 곳은 없는지 그 시절의 특급 재봉사들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몸에 맞추어 섬세하게 옷을 손보고 자연스럽게 맵시를 내게 해주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대/중/소, 66/77/88 사이즈에 맞춰 기성복을 사입는 것이 더 폼나는 일이 되었다. 버버리나 닥스 같은 다국적자본의 상표가 동네 최고 양복점의 자부심을 대신하게 되었고 우리 곁의 일등 장인들은 어디로 갔는지 찾기 어렵게 되었다. 그보다도 더 황당한 것은 표준형으로 만들어진 옷에 맞지 않는 신체가 뭔가 결핍되고 못난 것으로 인식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내 몸에 맞춰 만들지 않은 옷이 맞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바지 길이가 너무 긴 것이 아니라 내 다리가 너무 짧은 것이고 소매가 너무 끼는 것이 아니라 내 팔이 너무 굵은 것으로 간주된다. 옷이 우선이고 기준이어서 사람 몸을 거기에 맞춰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어디 옷뿐인가. 정치를 한다면 일단 정비나 단속부터 시작하는 게 관례가 되다시피 한 세태고 보면 천편일률 일사불란 나란히나란히 줄맞춰 세워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거리거리 나붙어 있는 플래카드는 아무 때나 아무 데나 쓰레기 버리지 마라, 여긴 단속하는 곳이니 뭐 하지 마라, 여긴 뭐하면 안되는 장소니 사전에 허가를 받아라가 대부분이다. 통치가 정치를 대신하고 단속이나 관리가 정치를 대변한다. 사회가 이러니 사람을 규격화하는 방법도 뻔하고 식상하다. 성적이 몇 등급이냐, 일류대 출신이냐, 토익이 몇 점이냐가 뭘 잘하는지, 성격이 어떤지, 뭘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 사람의 개성이나 소질을 대신한 지 오래다. 요컨대 사람을 위한 기준이고 합의가 아니라 기준을 위한 규제고 강제고 금지이니 사고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이렇게 전도된 기준이 강제되는 사회에 대한 비유적 일화가 등장한다. 프로크루스테스란 흉폭한 강도는 쇠로 만든 침대를 갖고 있었는데 그리스 아테네 교외에 살면서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아 이 침대에 누이고는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침대에 맞춰 늘리고 키가 크면 침대에 맞춰 잘라서 죽였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말은 바로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말로 자기 생각에 맞추어 남의 생각을 바꾸려는 행위,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기준을 관철하려는 폭력을 의미한다. 더구나 요즘에 이르러서는 프로크루스테스는 사라지고 그의 침대만 남아서도 건재하니 신화의 폭력조차 한참 넘어섰다. 사람이 스스로 타고난 모습을 긍정하지 못하고 주입된 잣대에 미달되었다고 자신과 불화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고 끔찍하다. 100명이면 100색인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지 않은가. 개성과 창의성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는 불온하고 불행하다. 기준이 우선되고 이것이 규제와 금지로 작동하는 사회는 개성이나 창의성이 자랄 새가 없다.

어린이날이 88회를 맞는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어린이들은 당대 권력 체계의 최하층을 구성하고 있었다. 일본인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뛰어놀고 있을 때, 조선인 어린이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저임금을 받고 모든 체력을 소진하고 있었다. 어린이의 인권을 천명하고 어린이의 교육권과 놀이권을 쟁취하여 어린이의 꿈과 희망을 지키고자 했던 소파 방정환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약자였던 어린이를 중심으로 식민지 조선인의 희망을 세우고자 했다. 따지고 보면 어린이가 행복한 사회란 결국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사회다. 우리 사회가 저마다 다른 어린이들의 개성과 소질과 꿈과 희망을 중심에 두고 어린이가 행복한 세상을 향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