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월 (한서대 교수·극작가)
[경인일보=]만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봄을 맞아 화사한 티셔츠를 하나 사면 어떨까. 굳이 비싼 것이 아니라도 봄날의 아름다움에 이미 취한 넉넉한 마음으로는 마트의 가판대 위에 놓인 밝은 셔츠 하나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이다. 겨울의 무거운 옷을 벗고 봄 셔츠 하나로 즐거워져서 고운 연둣빛으로 물오른 잎새들이 살랑거리는 가로수 길이며 동네 뒷산이라도 산책하다보면 마음이 가벼워질 것이다. 하지만 그 옷을 내가 입기보다 요즘 부쩍 우울해 보이는 앞집 아줌마에게 선물한다면 어떨까. 예상치 못한 손길에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을 보며 기쁨은 몇 배가 될 것이다. 혹은 만원으로 두 그릇의 자장면 혹은 된장찌개를 사는 것은 어떨까. 친구나 동료와 함께 소박한 식사를 하면서 마음을 나누고 대화를 하며 정겨운 점심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자리는 삶의 피로에 지친 마음을 잠시 달래는 시간이 되고 더불어 사는 작은 기쁨을 새삼 느끼게 할 지도 모른다. 만원으로 어버이날 선물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중고등학생들이 저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무언가를 사러 나서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야간 자율학습 때문에 선물 살 시간도 없겠지, 용돈도 없을 걸 뭐, 나중에 철들면 어버이날도 챙기겠지 싶어 마음을 접고 있는 엄마에게 생전 선물이라고는 모르던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아들이 손수건 한 장과 꽃 한 송이를 어색하게 내민다면 얼마나 기쁠 것인가. 오랫동안 용돈을 아껴온 초등학생 딸이 쇼핑센터에 가서는 가진 돈보다 비싼 넥타이를 골라놓고 어쩔 줄 몰라 하자 판매원 아줌마가 기특해 하며 오히려 포장까지 근사하게 해주었다는 무용담을 들려주며 선물을 내놓는 모습은 또 어떤가. 아버지에게 그것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귀한 선물이자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념이 될 것이다.

또는 책을 한 권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마음의 양식이 될 수 있고 인생의 지침이 될 수도 있는 책 한 권을 사서 읽으면서 진정 마음의 풍요를 누리게 될 것이다. 다 읽은 책을 다른 사람들과 돌려 본다면 만원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가치로 불어날 것이다. 만일 그 책이 몹시 상처받거나 길을 잃고 상심에 빠져 있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어 그로 하여금 새로운 삶의 의욕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리고 그로 하여금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된다면 한 권의 책을 사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선택이 될 것이다. 비단 그런 장황한 이유가 아니라도 책을 읽는 것은 그 자체로 순수한 기쁨을 주기에 만원으로 책을 사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그러나 또한 만원으로 기부를 할 수도 있다. 거창한 기부가 아니라 텔레비전에 뜨는 ARS 전화 한 통을 거는 일로 이름도 알 수 없는 희귀병에 걸린 아이를 도울 수도 있고 가보지 못한 저 먼 나라의 어린이에게 점심 도시락을 마련해줄 수도 있으며 어려운 처지에 놓인 할머니에게 십시일반으로 도움을 전할 수도 있다. 그것이 시작이 되어 점차 기부를 늘려가며 가진 돈의 일부를 이웃과 나누는 일에 마음을 쓰게 될 것이고 세상은 아주 조금씩 따뜻해질 것이다. 내가 아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나누어주는 일보다 한 번 만난 적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그 누군가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만원을 나누는 일은 더욱 큰 기쁨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 체험을 다른 사람과 다시 나누게 되면서 사람들은 점점 행복해질 것이다.

만원이 지금 내 주머니에 있다면 이토록 여러 가지의 즐겁고 행복한 일을 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늘 내가 가진 것이 적다고 불평하고 나눌 것이 없다고 생각해왔는지 모르겠다. 형제들이 콩 반쪽도 나누고 서로의 어려운 처지를 생각하면서 형은 동생에게 동생은 형에게 자기의 볏단을 몰래 가져다주던 시절에는 가난하다는 건 불편하지만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의 풍요로운 세상에서 저마다 자기만 생각하는 가난한 마음이 훨씬 더 초라하고 슬픈 것 같다. 따뜻한 봄날 따뜻한 만원으로 이런저런 즐거운 나누기를 해보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