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조영달기자]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51년, 김문수는 경북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에서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영천초교를 다닐 무렵, 공무원이던 부친이 친척의 빚 보증을 잘못 서 전 가족이 판잣집 단칸방으로 이사가는 비운을 맞았다.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는 시골집에서 호롱불을 밝히며 공부할 정도로 '소년' 김문수는 배움에 대한 열의 하나만은 대단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졸업 후 대구로 유학, 당시 수재들만 들어간다던 경북중·고, 서울대학교(70년)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합격한다.

기쁨도 잠시, 그는 71년 10·15 부정부패척결 전국학생시위로 제적된다. 이 때부터 '청년' 김문수는 사회 모순을 인식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다.

이후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와 4H운동, 야학 등 농민운동에 주력했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제적되고, 전국에 수배된다. 이어 도루코노조위원장(78년),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85년)으로 활동했고,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 지도위원이던 86년 개헌 투쟁으로 구속, 고문을 받고 2년 6개월간 복역한다.

▲ 가족과 함께 (맨 왼쪽이 김문수).
90년 이재오 등과 민중당 창당에 참여, 노동위원장으로 선임되면서 '정치인' 김문수의 행보는 시작된다. 당시 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중당 전국구 후보 3번으로 출마했지만 낙선한다. 94년 민주자유당에 입당했고, 96년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부천시 소사구에 출마한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박지원을 누르고 당선되면서 전국적인 스타로 발돋움한다.

이어진 10년간의 국회의원 생활은 김문수라는 이름 석자를 국민들의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깐깐한 성격, 빈틈없는 논리, 청빈한 생활 등으로 '가난한 국회의원'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다. 그랬기에 그는 당당했다. 또 대통령 친인척 비리를 폭로하는 등 야당 저격수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 경북중학교 입학식날 아버지와 함께.
이같은 저력으로 16, 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까지 뚫고 내리 3선에 성공한다.

2006년 도지사 선거에 출마, 당당히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주인공이 됐다.

'도지사' 김문수는 취임 첫해부터 '앞서가는 경기도' '편리한 경기도' '잘 사는 경기도' '매력있는 경기도'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삶의 질 향상에 전력했다. 불합리한 수도권 규제 폐지, 광역교통망 구축, 외자 유치를 위한 인프라 확충, 일자리 창출 등에도 노력했다. '무한돌봄'을 대표사업으로 도민 복지 향상과 DMZ 관광 활성화, 농촌체험마을, 레저항공전, 국제 보트전 등 신성장 동력산업의 추진에 정열을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