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구(수원대 경상대학장·객원논설위원)
[경인일보=]올 초에 잠시 일본에 다녀왔다. 와세다대학에서 주최한 학술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는데 세미나장에서 한 일본인 학자가 필자에게 느닷없이 "일본은 경제가 점차 위축되는 상황인데 한국은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 나가는 원인이 뭐냐"는 요지의 질문을 해서 당혹스러웠다. 세미나 주제와 무관한 질문이어서 필자가 예상답안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도쿄는 물론이고 여행 중에 지나쳤던 인근 주변도시들의 상점가마다 '세일' 문구 내지는 '다이소' 등 100엔숍들이 상당히 많이 눈에 띄었다. 관광지는 손님이 없어 을씨년스러웠으며 거리에서 마주치는 일본인들의 표정도 별로 밝아 보이지 않았다. 잠깐 동안 머물렀던 이방인에게도 장기불황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일본은 지난 10여 년 동안 초저금리에다 국가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2배에 이를 정도로 막대한 재정자금을 쏟아부었음에도 도통 경기가 살아나지 않고 있다. 덕분에 중산층 이상의 고소득자 계층이 점차 축소되고 있다. 지난 2000년부터 2009년까지 연 1천500만엔 이상의 소득자 수가 무려 30%나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1천만~1천500만엔의 상류층은 19%나 줄어들었다. 중상층에 해당하는 800만~900만엔 소득계층도 18%나 감소되었다. 대신 중하층에 해당하는 연소득 200만~400만엔 세대수는 같은 기간 50% 이상 증가했다. 작년 10월 기준 상대빈곤율은 멕시코, 터키, 미국에 이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 중 4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자동차 신규등록대수는 2000년 405만대에서 2009년에는 292만대로 줄어드는 등 작년 한 해 동안에만 경제가 5.4%나 쪼그라들었다. 소득양극화를 넘어 하향평준화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자칫 '1억 총중류' 신화가 사라질 지경이다. 선진국들 중 유일하게 디플레함정에 빠진 일본은 체면이 말이 아니다.

한때 제2의 경제대국으로 불리던 거함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계속될 전망이다. 가계부문의 부실은 내수위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기업과 정부에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장기불황과 물가하락, 초저금리, 저출산, 고령화, 연공서열 시스템 붕괴 등이 복합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경제는 어떠한가. 얼마 전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이 일본기업들에 한국기업을 벤치마킹하라고 일갈하더니 이번엔 블룸버그의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페섹이 "그리스는 한국에서 한 수 배울 것"을 강조했다. 1950년 한국전쟁 이래 최대의 국난(國難)으로 치부되던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금융위기의 충격에서도 가장 먼저 빠져나온 터였으니 말이다. 지난 4월 부품소재무역에서는 사상최대의 흑자를 기록했으며 산업용 전력소비도 꾸준하게 늘고 있다. 취업자 증가폭도 5년 만에 최대치로 불어나 실업률은 넉 달 만에 3%대로 떨어졌다. 가계소비지출은 4분기 연속 확장추세이다. 세계가 주목할 만했다.

정부 고위당직자들의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러나 최근 국내경제의 빠른 회복세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기인한 기저효과 내지는 착시효과의 인상이 짙다. 수출, 고용, 성장 등 거시지표들은 양호해 보이나 서민경제는 여전히 얼어붙은 탓이다. 오히려 구조적 취약성이 점차 노출되고 있다. 부동산거품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는 경고시그널들이 도처에서 간취되는 가운데 가계채무는 이미 700조원을 돌파한 지 오래이다. 실업자 수가 무려 420만명이고 비정규직 등 근로빈곤자 수도 다시 급증하는 추세이다. 법정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근로자 수만 무려 210만명에 이른다. 연공서열시스템이 빠르게 무너지는 와중에 저출산,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노인빈곤층도 덩달아 급증하고 있다. 복지지출도 OECD 30개 회원국들 중 최하위수준이다. 국가채무만 400조원에 이른다. 지방재정은 물론 공기업의 부채 또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기업내부 유보규모가 갈수록 커지는 점도 걸림돌이다.

일본경제의 위축현상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