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후 부정선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더욱 체계적이고 제도적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선출직이던 지자체장을 임명직으로 바꾸었고 공무원이 나서서 선거운동을 할 수 있게 했으며, 개별 선거구마다 두 명의 국회의원을 뽑아 으레 한 명은 집권 여당이 선출되도록 하였다. 직접선거를 폐지하고 간접선거제로 바꾸어, 아무런 반대나 이의 제기 없이, 선출이 아니라 옹립이나 추대라고밖에 표현될 수 없는 이벤트를 벌였다. 대놓고 부정을 저지르는 방식은 고작 10년밖에 버틸 수 없었지만 시스템을 바꾸는 이 방식으로는 20년을 넘겼다.
이제 대한민국에 이 같은 엽기선거는 없다. 그렇다고 그 어떤 부정도 없이 깨끗하고 공명한 선거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대규모 주류 언론의 편파적인 보도내용이나 시대 흐름을 역행하는 선관위의 고리타분한 운영도 문제이긴 하지만 사실 이는 부차적이다. 최근들어 대한민국 모든 선거의 최대 키워드는 '경제'이다. 신도시를 세운다, 재개발을 한다와 같은 투기성·선심성 공약이 선거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67년 국회의원 선거였다고 한다. 공무원을 앞장세워 어디에 공장을 지어주겠다, 어디에 다리를 놓아준다와 같은 시정 현안을 독점하여 지역을 차별하고 집권 여당의 지지를 물질적으로 보상하는 방식을 구사했던 것이다.
항산(恒産)이 항심(恒心)이란 말도 있으니 어쨌거나 물질적인 풍요가 안정적인 삶의 기초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부자가 되면 무조건 행복한가? 비싸고 좋은 옷, 차, 집 따위가 있으면 확실히 행복이 보장되는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안다. 화려한 외양을 중시하는 문화의 이면에는 초라하면 무시당한다는 공포가 잠재되어 있다. 결국 2010년 현재 한국인의 공포는 물질적 차별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현실,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는 반인권적 풍토에 있는 것이 아닌가. 다스림(治)이란 본래 군림하는 것이 아니었다. 치산(治山), 치수(治水)란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스림이란 조화와 안정을 전제하는 단어였다. 그렇기에 정치라는 것은 사람과 더불어 산과 물, 자연까지 포괄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먹을 밥이 없어 굶주리고 있다면 무료 급식소라도 서둘러 세워야 할 것이고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어 당당하게 살 수 없다면 시민교육이 화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더러운 거리와 하천이 문제여서 건강과 행복을 해치고 있다면 청소와 정리가 급한 일이고 사람들이 함께할 공간이 없다면 운동장을 세우고 건물을 짓는 것이 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물질적 차별에서 시작된 인간적 불안을 해소하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회, 우리 자신의 노력이 정당하게 인정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오늘은 지방선거날이다. 후보들의 약속이 함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내놓은 것인지 곰곰 따져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