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내 한 어린이집을 찾아 어린이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며.

[경인일보=이호승기자]김문수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951년, 경북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에서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영천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공무원이셨던 부친이 친척의 빚 보증을 잘못 섰다가 전 가족이 판잣집 단칸방으로 이사가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김문수는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는 영천읍내에서 호롱불을 밝혀 놓고 공부할 정도로 배움에 대한 열의 하나만은 대단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졸업 후 대구로 유학 오고, 당시 수재들만 들어간다던 경북중·고에 입학한다. 경북고 시절에서야 번듯한(?) 대구 남산동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김문수는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초가 두칸에 판잣집 한 칸을 사용했는데 어느 방에서나 천장 틈새로 파란 하늘이 보였고, 벌레가 기어다닐 정도로 볼품 없는 집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그는 70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합격한다.

▲ 1981년 서울 봉천동 사거리 밑 봉천중앙교회에서 설난영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71년 10·15 부정부패척결 전국학생시위로 제적된다. 이때부터 김문수는 가난을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바라보게 된다. 그는 사회의 모순을 인식하고 과감한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다.

이후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와 4H운동, 야학 등 농민운동에 주력한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제적되고, 전국에 수배된다. 김문수는 78년 도루코노조위원장, 85년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을 역임했으며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서노련) 지도위원이던 86년 인천 직전제 개헌 투쟁으로 구속, 고문을 받고 2년 6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이런 고초를 겪어가며 그는 서울대에 입학한지 25년만에 졸업장을 품에 안게 된다.

김문수는 정계에 입문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90년 민중당 창당에 참여, 노동위원장으로 선임되고,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중당 전국구 후보 3번으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94년 민주자유당에 입당 후 96년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부천시 소사구에 출마한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던 박지원을 누르고 당선되면서 전국적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다. 사실 김문수는 이재오 등과 민중당을 창당, 14대 총선에 나섰지만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

이어진 10년간의 국회의원 생활은 김문수라는 이름 석자를 국민들의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깐깐한 성격, 빈틈없는 논리, 청빈한 생활은 한나라당내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국회의원이 아니었고 '가난한 국회의원'은 어딜 내놔도 상대당의 공격에서 자유로웠다. 대통령 친인척 비리를 폭로하는 등 야당 저격수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 김문수 당선자는 서울대 입학 다음해인 1971년 10·15 부정부패척결 전국학생시위로 제적된 뒤 25년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이같은 저력으로 16, 17대 총선에서도 부천소사에서 '탄핵역풍'까지 뚫고 내리 3선에 성공한다.

그리고 2006년,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국회의원을 사임한다. 당 대표 경선 2차례, 그러나 매번 최하위권이었지만 6월 1일 밤 김문수는 당당히 주인공이 됐다.

취임 첫해부터 그는 '앞서가는 경기도', '편리한 경기도', '잘 사는 경기도', '매력있는 경기도'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도민의 삶의 질 향상에 전력한다.

이어 동북아 경제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는 지역적 특성을 살리고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불합리한 수도권 규제 폐지, 광역교통망 구축, 외자 유치를 위한 인프라 확충, 외자 기업 유치와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로 일자리를 창출해 나가고 있다.

또한 DMZ 지역의 관광 활성화, 농촌체험마을, 도자비엔날레, 항공레저전, 국제 보트전 등의 전시회 유치를 통해 경기도의 신 성장동력을 육성해 나갈 계획이다.

김문수는 또 광역 대중교통을 더 편리하게 개선하고, 접경지역을 체계적으로 개발하며, 노인 장애인의 복지증진과 맞벌이 가족에 대한 보육지원, 교육 경쟁력 강화, 문화예술과 도립공원 강화 등에도 관심을 쏟을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