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진영
[경인일보=]글로벌 시대는 다양성이 특징이다. 획일적인 것보다는 다양한 것이 존중받고 있다.

한국 역시 글로벌 사회에 진입해 있다. 단적인 예가 다문화 사회다. 외국인 아니 이제 한국인이 된 외국 출신들이 지구상 다양한 나라에서 건너와 살고 있다. 음식·문화·사고습관·태도는 물론 언어도 다양하다. 베트남 출신이 사용하는 한국어와 러시아 출신이 사용하는 한국어는 그 수준이 비슷해도 억양과 어휘 선택 등에서 차이가 난다. 우리가 외국에서 영어를 할때, 그 억양을 보고 한국 사람임을 바로 아는 것과 같다. 영국에서 출발한 영어는 미국어는 물론, 한국식 영어인 콩글리시, 싱가포르식 영어인 싱글리시를 만들 정도로 다양해져, 막상 영국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된 곳도 많다. 표준을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다양성의 인정과 표준화 노력은 상충될 경우가 많다. 다문화 사회통합도 그 한 예다.

한국 사회에 조속히 적응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한국인이 되는 것인가? 이를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음식 만들기 등 한국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한국 사회에 통합시키는 것인가? 출신지·종교·언어·지식·학력·경제적 사회적 배경이 매우 다양한 그들이 자신을 '빨리' 부정하고, '새로운 한국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오히려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한국을 받아들여서 '창조적인 한국'을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가 더 다양해지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다양성을 수용하여 변화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만 '빨리' 변화하여, '새로운 한국인'으로 태어나라는 것은 그들을 대상화시켜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소외'시키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사회통합 노력은 하나의 '쏠림' 현상은 아닐까?

쏠림은 어쩌면 지금 한국 사회가 가진 큰 문제이기도 하다. 전 국민적인 유행이라고나 할까? 한 사안이 사회에서 쟁점이 되면, 모든 언론 보도와 여론의 관심은 그 쟁점에만 매달린다. 그리고 시시콜콜한 문제까지 보도되고 유통되면서, 오히려 중요한 기본적인 쟁점과 구조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된다. 그리고 조금 지나면 금세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 쟁점으로 쏠리면서, 이전 쟁점은 소외된다. 거의 아무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외면된다. 최근의 월드컵 축구가 그 한 예다. 축구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졌던가? K리그 구장의 썰렁함과 월드컵의 꽉 찬 거리 응원은 대비된다. 천안함 사건도 그렇다. 46명의 젊은이들이 희생된 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았으나 선거후 잊혀진듯 무심하고,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외교관들이나 논의하는 사항이 되었다. 또 어떤 새로운 쟁점이 떠올라, 우리 사회 쏠림의 주제가 될까? 그리고 이전에 중요했던 쟁점들을 소외시킬까 생각하면 오싹하다. 그 어느 것도 치밀하고 철저하게 검토되고 중-장기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지 않은채, 이리저리 쏠리다가 변형된 채 소외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사회적 쏠림이 있을때,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여 합법적이건 불법적이건 최대한 이익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 같다. 신중하고 젊잖게 행동하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함은 물론 이후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쏠림은 글로벌 시대 한국의 덕목이 아니다. 60~70%의 시청률이 자랑이 아니다. 30%만 되어도 쏠렸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도 있으면서도 다양한 관심이 미래 국제사회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방책이다. 몇대 계속되는 장인정신과 그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장인의 축적된 문화는 더욱 빛을 발한다. 그리고 한국의 문화는 다양하고도 풍성하게 발전한다. 네팔 출신의 한국인보다 원 한국 출신이 네팔어를 잘하기 힘들다. 네팔계 한국인들이 한국어로 네팔 문제를 얘기하고, 한국과 네팔 관계의 미래를 설계할 때 우리 사회의 미래는 다양하게 밝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할 관용과 다양성에 대한 우리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쏠림은 소외를 일으킨다.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문제를 잡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