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동권 (경인교육대학교 총장)
[경인일보=]올해로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0주년이 되었다. 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었다. 건물과 시설은 물론 인간성마저 파괴해 버리는 고통의 경험을 가진 세대는 전쟁이라는 용어 자체도 사라지기를 바랄 것이다. 누구나 전쟁과 갈등을 넘어 평화와 화해·협력의 시대로 나아가기를 소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이런저런 일들로 고조된 긴장 상태에서 일어난 천안함 사건은 남북 관계를 예전의 대결 국면으로 되돌려놓은 느낌이다. 대북선전용 확성기를 다시 설치하겠다고 하니까 이를 파괴하겠다는 엄포를 놓고 있다. 확성기는 과거 남북대결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자기 체제를 선전하고 상대 체제를 비난하는 도구로 사용되던 것이다. 이는 일방향적 통고 수단이지 쌍방향적 소통 수단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확성기의 재등장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요즘 우리 사회는 대화의 논리보다 확성기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집단간 갈등이 발생하면 서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확성기를 동원하여 상대방보다 더 큰 소리로 자신의 논리와 주장을 전달하고 관철시키고자 한다. 이와 같은 확성기의 사용은 큰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확성기로 증폭된 자신의 주장과 논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니까 마치 소통이 잘 된 것으로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다른 집단의 목소리가 확성기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따름이지 진정한 소통과 설득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확성기에 의해 자신의 목소리가 묻혀버린 사람들은 이에 대항하여 자신만의 확성기를 준비하게 된다. 그 결과 갈등이 해결되기는커녕 더 큰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사회의 다원화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지향과 방식이 다양해지기 때문에 하나의 정치 공동체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상호 소통과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각자가 자신의 주장을 확성기에 담아 증폭시킨다면 그것은 대화가 아닌 독백이 될 것이며, 우리 공동체는 점차 갈등과 분열로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욕구를 자제하고, 상대방의 말에도 귀 기울이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소통을 위한, 소통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언젠가 이런 애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손에 가방을 든채 버스를 타려고 정류소 팻말 위치에 서 있었는데, 타려는 버스가 오더니 자기가 서 있는 곳까지 오지 않고 버스로 달려온 사람들만 태우고서는 그냥 떠나버리더라는 것이다. 가까스로 다음 버스를 탔지만 문제는 버스에서 내릴 때도 생기더라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승강구로 나가는데 버스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넘어질 뻔 했다는 것이다. 미리 승강구로 나와 대기하게 하는 우리의 관행은 건강한 보통 사람들에게는 별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신체장애자나 부자유스러운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편하고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버스 승객들의 안전을 위하여 정차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내리는 것을 규칙으로 정한 나라도 있다니, 우리나라도 버스 문화를 이런 방향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이 얘기를 한 사람도 이러한 경험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버스 문화가 신체 부자유자들에게 얼마나 불편하고 위험한가를 아마 깨닫지 못했을 것이고, 버스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양한 집단의 소통을 위한 교육은 이와 같이 자신과 다른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아이들에게 노인들의 신체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노인체험학습을 실시하는 것도 세대간 소통을 위한 하나의 의미있는 교육방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소통을 위한 교육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교육자와 학습자간, 또 학습자 상호간의 원활한 소통 체험이 선행되어야 한다. 교육자가 학습자에게 교육 내용을 주입시키는 일방통행식 교육은 소통을 위한 교육 방식으로 적합하지 않다. 이러한 일방통행식 교육을 통해 집단간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학습자들에게 모순과 혼란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밝은 소통과 건전한 토론문화 정착, 갈등 관리와 상생공동체의 발전을 위하여 소통을 위한, 소통의 교육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