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몽┃황석영, 창비, 380쪽, 1만2천원.

[경인일보=김선회기자]1994년, 멀쩡하다고 생각되었던 다리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TV앞을 떠나지 못했던 아침이 있었다. 1995년, 멀쩡하게 보인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건물 잔해에 깔린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던 저녁이 있었다. 이 두 사건은 멈출 줄 모르고 질주해온 개발시대의 욕망과 그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 사회가 뒤를 돌아볼 수 있게 해 준 사건들이다.

황석영(67)의 '강남몽'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을 비롯하여 현재의 우리 삶을 규정하는 역사적 출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수십년에 걸친 남한 자본주의 근대화의 숨가쁜 여정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이는 작품이다. 3·1운동 직후부터 한국전쟁 군사정변을 거쳐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남한 자본주의 형성사와 오점투성이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특히 그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강남'으로 상징되는 남한 자본주의의 일면을 자세히 그려냈다.

소설은 강남의 대형백화점이 무너지는 1995년 6월에서 출발해 3·1운동 직후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강남 형성사'를 담았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백화점 회장의 후처가 되면서 '강남 사모님'으로 신분 상승한 화류계 출신의 박선녀, 일본 헌병대 밀정으로 일하다 해방 후 미국 정보국 요원을 거쳐 기업가로 성공한 재벌 회장 김진, 강남 부동산 투기로 큰돈을 번 심남수, 개발독재시대 밤의 암흑가를 주름잡은 조직폭력배 홍양태, 어려운 살림에도 희망을 품고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는 임정아 등이 차례로 등장해 '강남의 꿈'을 재구성한다.

중심이 되는 다섯 인물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백화점 붕괴사고를 비롯해 제주 4·3항쟁과 여순사건, 5·16 군사쿠데타 등 현대사의 굵직한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방대한 역사와 거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이야기는 빠르고 힘 있게 전개된다.

황씨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차례로 무너진 1990년대 중반 무렵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질적, 양적으로 큰 성장을 했지만 우리 욕망의 뿌리는 그대로 남아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