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김명래기자]'개항도시'에는 외국인 묘지가 있다. 개항과 함께 각 나라와 수호통상조약을 통해 형성된 각국 조계(치외법권 지역)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위한 묘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883년 개항과 함께 일본, 중국(청나라)을 비롯한 각 나라들과 조약을 맺으면서 인천에 외국인 묘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수교 이전에 인천에 살다가 사망한 외국인들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매장됐다가, 수교 후 조성된 각국 공동묘지로 이장됐다고 한다. 중국, 일본인을 제외한 서양인들이 묻힌 묘지는 '외국인 묘지'로 명명됐다.

중국인 묘지는 1884년 우리나라와 중국이 맺은 '인천구화상지계장정조약'에 따라 '제물포에서 10여 리 떨어진' 도화동에 조성됐다. 이후 중국인 묘지는 인천대학교 개교와 개발사업에 밀려 만수동, 부평공설묘지(현 인천가족공원)로 두 차례 이전됐다.

일본인 묘지는 1884년 중구 신흥동에 처음 생겼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사망한 일본 군인들이 이곳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이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일본인 묘를 모아 1902년 율목동에 공동묘지가 생겼다. 한국인 집단 거주지 한복판에 일본인 묘지와 화장장이 위치했다. 이후 1922년 숭의동으로 이전된 일본인 묘지는 현재 인천가족공원에 자리잡고 있다. 일본인 묘지가 현 위치로 이전된 정확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인천가족공원측은 "30여년 전부터 있었는데, 언제 옮겼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외국에서는 '외국인 묘지'를 역사·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곳이 많다.

일본 요코하마 모토마치 공원 부근에는 2만㎡ 땅에 4천200여명의 외국인 묘(비)가 안치돼 있다. 1900년부터 요코하마 외국인묘지 관리위원회를 두고 이 지역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외국인 묘지 주변은 공원과 100여년 전의 근대 건축물로 둘러싸여 있어 찾는 이가 많다. 독일 베를린의 시립 룰레벤 묘지에 가면 베트남어가 새겨진 묘비가 많다. 불교식 묘역도 최근 조성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 일하러 왔다가 고국에 전쟁이 발발하자 돌아가지 못하고 먼 이국땅에서 숨진 베트남인들의 묘가 많다고 한다.

인천 외국인 묘지에 안치된 이들 가운데는 '역사적 인물'도 많아 가치가 높다. 엘리 바 랜디스(1865~98·미국)는 인천 최초의 현대식 병원과 영어학교를 지은 인물이다. 우리탕(1843~1912·중국)은 구한말 외교 분야에서 다양한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세창양행의 헤르만 헹켈(1877~1935·독일), 타운센드 상회의 윌터 타운센드(1856~1918·미국)는 개항기 무역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