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김명호기자]80·90년대 패션 1번지, 당시 수학공식 처럼 1층 옷가게 2층엔 대부분 커피숍.

답동성당 앞 몽마르뜨와 통일다방, 애관극장 뒷편 대포파는 누나집, 이모집은… 젊은이들의 집결지.

90년대 후반 IMF와 도시개발 여파 신포동은 '죽은거리' 사람들 기억서 사라져….

10여년이 흐른 2010년. 인천 아트플랫폼 조성 거리에 다시 넘쳐나는 악기소리 사람들. 펜타포트 페스티벌이 시작된 이후 1주일간 1만여명 다녀가 낯섦을 상품으로 신포동의 화려한 부활….

▲ 1980~90년대 인천시민들의 낭만과 추억의 명소였던 인천시 중구 신포동이 낯설음이란 컨셉트를 무기로 전국 각지의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역사·문화도시로 변신. 화려한 부활을 예고 하고 있다. 11일 오후 신포동 로데오(패션)거리에는 신포동을 찾는 차량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다. /김범준기자 bjk@kyeongin.com

▲ 노스탤지어 신포동

1980년대에서 90년대 중반까지 인천 중구 신포동은 '인천의 명동'이라 불릴 만큼 화려했다.

당시 신포동을 걷다 보면 나이키, 아디다스, 퓨마 등 일명 메이커 옷가게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옷가게 2층에는 커피숍이 들어서 있었다.

무슨 수학공식이라도 적용된 듯 신포동 주요 거리의 상점들은 이런 형태가 많았다. 신포시장 한편에는 옷을 수선해주는 전문 수선집이 수십 곳은 됐다.

당시 유명 메이커 옷을 파는 대형 상점의 한달 매출이 5억원은 됐다고 한다. 패션1번지라 불렸던 신포동 상권의 위세를 알 수 있다.

조선옥과 경인면옥 등 인천에서 한가닥 한다 하는 음식점에서는 제물포고와 인천고 등 각 학교 동문회와 대학 모임이 끊이지 않았다.

답동성당 앞에 있던 몽마르뜨와 통일 다방은 젊은이들의 집합소였다. 싼 값에 원두커피를 맛볼 수 있던 다방은 인천에서 이 곳이 유일했다. 애관 극장 뒤편에는 누나집, 이모집 등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들이 자주 찾는 대포집이 늘어서 있었다.

90년대 초반, 초등학교 6학년때 쯤 이었던 것 같다. 나이키 상표가 새겨진 면티 하나를 갖고 싶어 엄마한테 졸라 중구 신포동을 찾았던 기억이 난다.

쇼핑이 끝난 후에는 차이나타운의 자장면을 먹고 자유공원에 올라가 비둘기떼와 씨름하다 보면 훌쩍 하루가 지나갔다.


스승의날 선물을 사기 위해 동인천에 있는 인천백화점을 갔던 기억도 난다. 애관극장에서는 007시리즈를 상영했다.

신포동에 대한 기억은 그때쯤에서 멈췄다.

90년대 후반부터 남동구 구월동을 비롯한 도심 이곳저곳에 백화점이 하나둘씩 생기고 그 주변을 중심으로 유행처럼 호프집과 패스트푸드점, 옷가게가 들어섰다.

더 이상 신포동을 갈 필요가 없었다. 옷 살 곳도 많아졌고 친구들과 놀 장소도 늘어났다. 신포동은 우리에게 더 이상 인천의 명동이 아니었다.

도심이 커지고 택지개발을 통해 이곳저곳에 아파트단지와 주변 상가들이 늘어나면서 어느 순간 신포동은 인천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주안으로 구월동으로 부평으로 젊은이들은 몰렸다. 97년 한국을 강타했던 IMF는 신포동 상권을 주저앉히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신포동은 죽은 거리가 됐다.

죽은 신포동 대신 그 자리를 구월동과 연수동, 부평, 송도 등 신흥 상권이 메웠다.

 
 

▲ 낯섦을 상품으로, 신포동의 화려한 부활

지난 1일 중구청 앞에 있는 인천아트플랫폼 야외공연장. 조용하던 신포동 거리에 기타와 드럼, 트럼펫 소리가 울려퍼졌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은 장단에 맞춰 머리를 흔들었고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은 아이를 안고 발을 굴렀다. 너나 없이 무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인천문화재단이 주관한 인천펜타포트페스티벌이 시작된 날이었다. 그날 밤 신포동 거리는 젊은이들로 넘쳐났고 술집과 음식점은 밤 늦게까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머릿속에서 잊혀졌던 신포동의 모습이 재현된 듯했다. 페스티벌이 열렸던 일주일간 신포동에는 1만여명의 사람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10여년 넘게 죽어 있었던 신포동 거리가 되살아나고 있다. 신포동을 떠났던 옷가게가 돌아오고, 아담한 카페와 직접 만든 공예품을 파는 공방 등이 하나둘씩 문을 열어 손님을 맞고 있다. 주말이면 카메라를 목에 걸고 신포동 구석구석을 누비는 디카족들이 경인전철을 타고 이곳까지 온다.

최근에는 중국, 일본 등지에서 온 외국 관광객들도 흔치 않게 볼 수 있다. 신포동의 부활을 알리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신포동이 변화하고 있는 것은 신포동만이 갖고 있는 '낯섦'을 관광상품화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최근 인천 중구청은 이 주변의 오래된 일본식 건물과 교회, 학교 등 개항장이었던 이 곳의 근대건축물과 차이나타운 등을 한데 엮어 '인천 개항 누리길'이란 상품을 만들어냈다.


제주도의 올레길처럼 인천의 근대 건축물을 코스별로 관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인천사람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이런 건축물과 풍경이 외지 사람에게는 흥미로운 볼 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신포동 인근에 있던 이런 건축물들과 그에 얽힌 역사적 배경들을 스토리로 엮어 죽은 건축물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이다.

인천문화재단이 오래된 일본식 창고와 인쇄소 등을 개조해 문화공간으로 만든 아트플랫폼도 큰 역할을 했다.

1930~40년대 만들어졌던 근대 개항기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이곳에는 창작스튜디오와 아카이브, 교육관, 전시장, 공연장 등이 입주해 있다.

아트플랫폼을 중심으로 개항장 일대의 거대한 거리가 '스트리트 뮤지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런 공간이 만들어지자 전국에서 예술가들이 하나둘씩 몰려들었고, 자연스럽게 아트플랫폼 주변으로는 이들이 운영하는 공방과 작은 카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개항장의 창고를 개조해 만든 이런 문화공간은 그 자체만으로도 볼거리가 됐다.

'시간의 흐름속에서 거리로 존재하는 미술문화공간'이란 아트플랫폼의 취지처럼 낯선 건물과 거기에서 생활하는 예술가들의 일상은 이 곳을 찾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신포동이 갖고 있는 낯섦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오래된 명곡을 지금도 LP판으로 들려주는 '흐르는 물'과 '탄트라' 등의 카페는 마니아들이 찾는 명소가 됐다.

모베터블루스와 바텀라인 등 하우스 밴드가 직접 출현해 재즈와 팝송을 연주해주는 신포동 인근의 술집은 우리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해 준다.

1980~90년대 신포동은 먹고 마시고 노는 인천시민들의 생활의 영역이었다면 현재의 신포동은 낯섦이란 콘셉트를 무기로 전국 각지의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역사·문화도시로 변신하고 있다.

낯섦을 무기로 한 신포동의 화려한 부활. 신포동이 새롭게 태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