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역협정으로 부르면 자유무역에 대한 반발이 있을 수 있고, 경제연계 혹은 경제협력 등의 명칭은 자유화보다는 상호 협력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반개방 정서를 누그러뜨리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변형된 협정명칭을 사용하는 국가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명칭이 현란할수록 실속없는 협정이란 점이 확실한데도, 밋밋하게 들리는 FTA보다는 변형된 명칭이 더 나은 협정인 것으로 인식하는 국내 인사들도 적지 않다.
보통명사인 FTA 대신 다른 명칭이 채택된 협정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변형된 FTA 명칭을 제안하는 국가들은 대체로 FTA 시장개방에 소극적인 국가들이다. 일본, 인도, 멕시코, 러시아, 남미 등이 변형된 FTA 명칭을 제안하는 국가들로, 협정은 체결하되 폭넓은 시장개방에는 반대하는 입장이 강하다. FTA는 시장개방을 중심으로 삼지만, 다양한 협력사업을 통해 양국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EPA, CEPA 등으로 협정을 명명해야 한다고 이들 국가는 주장한다. 하지만 명칭과는 달리 변형된 명칭이 부여된 협정치고 회원국간 협력사업에 대한 내용은 별로 없다.
둘째, 변형된 협정의 구조가 기존 FTA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인도 포괄적경제연계협정(CEPA)을 살펴보면, 우리나라가 체결한 다른 FTA에서와 같이 상품교역, 서비스교역, 투자, 경제협력 등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 특별히 포괄적이거나 경제연계를 강조하는 내용이 없다. 인도측은 협상에서 FTA 용어 자체가 자국에서 정치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우므로 CEPA로 할 것을 제안했고 인도측 사정을 파악한 우리 통상당국은 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셋째, 현란한 명칭과는 달리 시장개방 범위와 폭이 좁다. 일본이 우리나라와의 FTA에 대해 협상했던 2003~2004년 EPA 명칭 사용을 고집한 배경 역시 인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경쟁력을 구비한 일본이지만, 농업에 대해서는 강한 보호주의 정책을 실시하고 있어 우리나라와의 FTA 협상에서 농업개방을 매우 꺼렸다. 일본의 농업 협상 관계자들은 양국간에 추진하는 협정은 '자유무역'을 추진하는 협정이 아니고 양국간 민감산업을 적절하게 고려하는 경제연계협정이란 점을 들어 농업개방 예외까지 주장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이후 FTA 체결 건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많은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FTA 체결에 주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FTA 추진 국내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거나, FTA 반대 여론을 극복하기 어려운 국가는 변형된 명칭으로 알맹이가 부족한 협정을 양산해 냈다. 그 결과 '무늬만' 개방을 하면서 엄격한 원산지 기준을 도입함으로써 실제로는 무역개방을 수반하지 않는 협정이 많아졌고, 이로 인해 FTA 자체가 무역장벽으로 작용한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경제이익 확보를 위해 FTA를 체결해 왔고, FTA 불모지였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는 다수 국가와 FTA를 이행중에 있다. 또한 조만간에 미국, 유럽(EU)과의 FTA도 발효될 것이므로 이제부터는 여유를 가지고 FTA를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체결한 협정의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FTA 기본모델을 만들고, 이러한 구조와 내용을 수용할 수 있는 국가와의 FTA를 내실있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
금년 들어 우리 정부가 중국과의 FTA 협상을 추진함에 따라, 그동안 중단되었던 한일 FTA 협상 재개를 검토할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과의 FTA 협상 재개는 명칭부터 바로 잡아야만 국익에 부합하는 협정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고, 일본측이 이점을 충분히 인식할 때 긍정적인 검토를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