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복 (한양대 철학과 교수)
[경인일보=]정의의 여신 유스티시아는 천으로 눈을 가린 채,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눈을 가린 건 감각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저울과 칼은 모든 사람은 동일한 규칙에 따라 동등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공정성 혹은 불편부당성이 정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번 광복절 축사에서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라는 개념을 불쑥 꺼내 적지 않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올 여름 불황 속 서점가를 강타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저자도 놀라고 우리도 놀라게 하며 정의라는 가치가 우리 사회 이슈가 되었지만, '공정성으로서의 정의'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조그만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자마자 몇 달 사이에 수십만 부가 팔려나가고, 급기야는 더운 여름날 초청까지 받아 졸지에 수천 명 청중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은 샌델에게는 입이 귀에 걸릴 일이지만, '공정성으로서의 정의', '공정한 사회'를 강조한 사람은 사실 샌델이 아니라 그의 하버드대 철학과 동료이자 '정의론'의 저자인 롤즈다.

여하튼 2010년 이 폭염 속에서 정의라는 화두를 들고 있는 우리에게 정작 간절한 건 샌델이나 롤즈 같은 생소한 이름이 아니다. 또 그들이 정의와 공정한 사회를 어떻게 규정하든 간에, 우리는 그런가 하고 고개를 끄떡일 뿐이다. 그러나 이번 8월15일 공교롭게도 같은 날에 MB가 '공정한 사회'를 길게 설명하고, 손학규가 정계복귀를 선언하며 '함께 잘 사는 나라와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강조하고, 박근혜가 국립묘지에서 '사회적 약자가 보호되는 함께 잘 사는 사회'를 언급하며, 정의의 전도사 이재오가 '정의로운 국가, 공평한 사회, 행복한 국민'을 외친다면 우리는 '그게 뭔데, 왜 지금 갑자기 공정과 정의를 들고 나오지, 또 뭔가 있는 것 아냐'하는 의구심마저 갖게 된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다함께 잘사는 사회, 이 얼마나 가슴 뛰는 말인가. 정치인의 본분이 백성을 고루 따뜻하게 하는 것이라면, 정치인에게 이 말은 아무리 써도 지나치지 않는 참 좋은 말이다. 동서고금 좋은 말은 그러나 아쉽게도 감동을 주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 발화자가 정의와 공정과 약자 등 참 좋은 말들을 아무리 소리 높여 이야기한들, 그것이 수화자에게 진정성 있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건 그저 공허한 의미 없는 말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진정성을 담아낼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정의가 '강자'가 아닌 '약자'의 이익이 될 수 있을까.

2천500년전 플라톤은 정의의 정의(定義)에 대해 트라시마코스와 힘겨운 논쟁을 벌인다. 트라시마코스는 현실주의자답게 정의란 강자가 자기 입맛대로 짜맞추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맞서 정의란 사회의 각 계급이, 영혼의 각 부분이 잘 조화를 이룬 상태라고 이상주의자 플라톤은 대응한다. 그에 따르면 정의로운 사회란 각 생산, 수호, 통치 계급들이 자신에게 부과된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여 조화를 이룬 사회이고, 정의로운 인간이란 욕망, 의지, 이성이라는 영혼의 세 부분이 절제, 용기, 지혜의 덕에 따라 능력을 발휘하는 인간이다. 플라톤의 말 가운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정의로운 인간이야말로 정의로운 사회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는 타오르는 욕망을 적절히 절제하고 불굴의 의지로 불의에 맞서며 빛나는 이성으로 사리를 명철하게 구분하는 정의로운 인간만이 나라의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사회구성원들에게 깊은 공감과 진한 감동을 줄 수 있고, 그래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함께 잘 사는 공정한 사회'와 같은 정치인의 좋은 말들이 비로소 진정성을 가지고 정의가 강자가 아닌 '약자의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자는 논증으로 먹고 살고, 정치인은 구호로 먹고 산다. 논증에는 논리가 필요하지만, 호소에는 공감이 필요하다. 정치인의 진정한 공감은 그 자신이 그런 삶을 살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래서 '참 좋은 말'들을 하는 정치인들에게 정의의 여신은 물을 수 있다. 또 국회 청문회장에서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지금도 기를 쓰고 묻고 가엾게 답하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그대는 정녕 정의로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