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명구 (아주대 교수)
[경인일보=]늦은 밤 수원에서 경기도 광주로 가는 버스안의 풍광은 서민의 고단한 일상이 배어있는 풍경화다.

강원도 산골 양구의 찌든 그러나 순박한 가난을 자양분으로 박수근이 화폭에 그려낸 군상들이 방금 그림 속에서 걸어 나와 버스를 타고 간다. 40대로 보이는 한 사내는 막걸리 냄새를 풍기며 필경 오랜 노동으로 뭉툭해졌을 손마디로 억세게 머리 위 손잡이를 잡고 졸며 서있다. 그의 어깨에 걸린 빛바랜 가방에는 수건이며 작업복이며 소소한 연장이 들어있을 것이다. 손 전화로 아이에게 "그래 밥 먹었니? 학원 갔다 왔구? 여기 어딘데 엄마 곧 갈거야. 기다려" 하는 아주머니는 죽전 어디 근방의 대형 할인점 계산대 일을 마쳤거나 아니면 식당 홀 서빙 후 앞치마에 썩썩 손을 문대고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길일게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침침한 불빛 아래서 토익 책을 펼쳐들고 영어 단어를 외우는 저 여학생은 휴학 중 알바하며 취업대비 스펙을 쌓고 있는 착실하지만 넉넉잖은 뉘 집의 사랑받는 딸 일게다. 옅은 화장에 단정한 차림새의 버스 기사 아주머니는 더위에 지쳐 얼음과자를 한 입 베어 물면서도 "어서 오세요"라고 승객들에게 다정히 인사를 건넨다. 참으로 찡한 풍광에 "참 열심히 사시네요" 라며 내가 덕담을 건네자 기사 아주머니는 "감사해요. 근데 안 그러면 죽어요" 라고 웃으며 답한다.

비록 10년은 다 된 자가용이지만 광주 집에서 수원 학교로 편안히 출퇴근하던 내가 술 모임 약속 때문에 평일 늦은 밤 버스를 타고 귀가하며 본 고단한 인생들의 일상이다. 하는 일에 비해 과분하게 대접받고 사는 직업을 가진 내가 어찌 이들의 일상에 소소히 들어가 그 마음과 몸의 곤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으랴마는 그래도 매일 가마타고 다니다 정말로 정말로 미안한 심정으로 가마 메는 사람들의 마음을 잠시 느껴 보았다.

새 내각명단이 발표된 지난 8월 8일 이후 한 달여는 신데렐라의 화려한 등장과 곧이어 드러난 권력 엘리트들의 비루함으로 얼룩져 온 국민을 혼돈으로 몰아간 시간이었다.

이제 가을 문턱에 섰으니 한 발자국 물러나 차분하게 돌아볼 시간이다. 찬찬히 돌이켜 생각해보니 조롱과 비난, 그리고 탄식과 분노는 많았지만 성찰의 화두는 쉽게 발견하기 힘들었다. 성찰을 대신한 것은 정파별 손익계산서와 향후 정국에 대한 언론의 전망이었다. 우리는 밥 술 좀 먹고살게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누가 무엇을 얻고 잃는가에 관한 전략적 사고에는 능하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규범적 사고에는 미숙아로 전락하여 버렸다. 그러니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외국 유명대학의 정치철학 교수가 쓴 정의에 관한 번역본 한 권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야만 죄의식을 덜 느낄 정도까지 되어버린 것이다. 훌륭한 책이지만 단언컨대 그만한 책은 내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많다.

성찰의 화두는 거창하지 않다. 미안해하는 마음에서 찾을 수 있다.

김태호 총리 내정자가 첫 출근하며 국민에게 한 첫마디는 "나는 소장수의 아들이다" 였다. 어설픈 서민적 작위(作爲)를 통한 그의 대국민 소통 방식은 자수성가를 앞세운 일방성이었다. 내가 했으니 너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그러나 그의 발언에서 '안 그러면 죽을' 정도로 성실하게 사는 무수한 '소장수 아들, 딸'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읽기 힘들었다. 쪽방촌 투기와 위장전입 특허전문인 여타 후보자들은 논의의 대상도 못된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지난 번 칼럼(인민 루니 세대에 대한 오해) 에서 걱정하였던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기어이 낙마하였다. 아무리 말실수가 많았어도 적어도 딸의 특혜성 외통부 취업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면 그는 이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제일 미안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시민들 자신이다. 이것 저것 다 눈감아주고 그것도 압도적 다수로 대통령 뽑을 때는 언제고 당시에 비하면 지금은 별 것도 아닌 것에 이렇게 핏대 올리는 시민들은 스스로에게 미안해하여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