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용완 (논설위원)
[경인일보=]교편(敎鞭)은 출석부와 함께 교사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교사가 수업이나 강의를 할 때 필요한 사항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가느다란 막대기, 교사의 회초리가 교편이다. 반장의 우렁찬 '차렷' '경례' 소리와 함께 교탁을 두드리는 회초리의 둔탁한 소리로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렸고, 어수선한 수업분위기를 다스리곤 했다. 물론 쓰임새의 위력은 매에 있다.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회초리는 교사의 위엄이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교편을 잡았다는 말은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고 있다는, 교사와 교편은 동의어로 통용되기도 한다.

전통서당에서 훈장은 회초리로 매를 들었다. 그 당시 회초리는 가르침의 도구로, 서당교육의 초달문화(楚撻文化)에서 유래한다. 서당에 아들을 맡긴 아버지가 산에서 나무를 할 때 가장 매끈한 싸리나무를 골라 한 다발 묶어 훈장에게 전달한다. 아들을 잘 가르쳐 달라는 뜻이 담겨 있다. 훈장은 아버지의 정성이 묻어 있는 이 싸리나무를 학동의 올바른 교육에 사용했다. 초달은 어버이나 스승이 자식이나 제자의 잘못을 징계하기 위해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사랑의 매의 시작이다. 물론 이같은 풍습을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격이다.

학생 체벌과 두발·복장 규제 금지 등을 담은 학생인권 조례 제정안이 도의회에 제출된 마당에 새삼스럽게 사랑의 매를 들먹이는 것은 교육현장에서 교사의 모욕과 수난이 도를 넘고 있어서다. 학부모가 교사를 폭언·폭행하고, 제자로 부터 폭행을 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충격적인 사건까지 일어나고 있는 것이 우리의 교육현장이다. 도저히 교사로 인정해 주기 어려운 교사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인 상황에서 학부모와 학생의 문제시 되는 행동만을 끄집어내 질타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매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서 대체 훈육이 필요하며, 그 것은 교육현장을 지키고 있는 교사들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학교 교육의 중심에 있는 교사의 경험만큼 큰 자산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에 교사들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드는, 사기를 땅에 떨어뜨리는, 역할을 혼란에 빠뜨리는 사건이 발생해 고육현장이 더욱 어수선하다. 경기도의 한 사립 고등학교 교장이 학생 복장지도를 소홀히 했다며 교사들을 체벌로 다스렸다. 교육의 주체로서 학생에게 가르침을 주는 교사에게 체벌은 그 자체가 성립될 수 없으며, 그 것도 학생들이 지켜보는 교실이라면 교육의 근본을 흔드는, 땅에 떨어진 권위마저 짓밟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교장의 해명은 우려섞인 눈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는 뭇 사람들을 더욱 슬프게 한다. "복장과 두발이 불량한 학생들을 야단치는 과정에서 '너희가 잘못하면 담임선생님이 혼난다'는 뜻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흉내를 냈을 뿐이다" "15분 뒤 교사들을 교장실로 불러 사과했다" 41년째 교장만 하고 있다는 분의 행동으로는 믿을 수 없는 함량 미달이다.

교장의 의중을 헤아려 알아서 행하는, 학부모와 학생의 눈치를 보면서 교육현장을 지키는 교사가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기 보다는 안타깝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교사의 역할이 훈육없이 지식만을 가르치는 지식전달자로서 존재가치만 인정된다면 교편은 의미부여를 못한 채 박물관 한쪽을 차지하는 구시대의 유물로만 남아 현 시대에서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교육은 앞선 사람이 아직은 덜 성숙된 후학을 가르치는 고도의 지적 전인적인 행위다. 교사의 교육적 권위가 존중되지 않으면 사회적 인간을 만드는 학교 교육은 필요치 않다. 학교 교사의 회초리는 '폭력'이고 학원 선생의 매는 '사랑의 매'라는 자조적인 말이 교사들 사이에 떠돌고 있는 마당이다. 교사의 권위와 학생의 인권이 부딪치면 교육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할 지도 모른다. 이 시대에 어울리는 또 다른 의미의 교편이 절실하며, 이는 교육의 한 주체인 교사로부터 나와야 한다. 이 시대의 교육적 가치를 만드는데 그들의 경험만큼 유용한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