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아이들이 좀 크면, 부모들의 이런 극진한 노력도 종종 배신(?)을 당하는 듯하다. 얼마전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키우는 직원의 고민을 들었다. 성적이 제법 상위권이어서 어떻게 하면 잘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줄까 고민하던 엄마의 기대와 달리, 아들은 2학기 중간고사를 앞두고,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폭탄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학생의 본문이니까' 갖가지 당위성을 설명해 봤지만, 아이는 도무지 납득하고 수긍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직원은 결국, '그래서 넌 뭐가 될 건데?', '꿈이 있을 거 아냐? 그게 공부 없이도 되는 거면, 공부 안 해도 돼' 라고 마지막 수를 던져 보았더니, 돌아오는 답은 '하고 싶은 거 없어요'였다고. '아마도 사춘기여서 그렇겠지' 싶다가도, 그저 어느 집 아들이야기에서 그칠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요즘 우리 아이들에게 '나중에 커서 뭐 될래?'라고 질문하면, 돌아오는 답의 열에 여덟, 아홉은 '몰라요'다. 미국에 살 때, 대부분의 십대들이 꿈이 없는 그 나라의 미래가 걱정스러웠던 적이 있는데, 지금 한국의 청소년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반면, 컴패션 수혜국 현지에서 만나는 어린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경찰이 되어서 엄마를 지켜주고 싶다', '의사가 되어 아빠 병을 고쳐주겠다', '선생님이 되어 동생을 가르쳐 주고 싶다' 등 이유까지 보태서, 척척 답을 한다. 컴패션이 보는 '가난'은 개인의 삶에 선택의 기회가 없는 것을 말한다.
가난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그것과 상관 없이 어린이는 가난의 가장 큰 피해자다. 어린이는 전쟁과 학대와 질병에서도 도망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가난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믿고 살아가는 순수한 영혼들이다. 경제적 빈곤과 문맹, 사랑의 결핍과 같은 여러 가지 가난한 환경에 놓인 어린이들에게 후원자의 도움은 최소한 꿈을 꿀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렇게 아이 하나가 교육을 받게 되면, 그 가정에 한줄기 빛이 생기고, 그 아이를 통해 꿈꾸는 미래는 곧 그 가족의 희망이 된다.
지난해 후원자의 밤 행사 때 우간다에서 온 청년, 이사야를 만났다. 12남매 중 장남인 이사야는 9년 동안 온 가족이 떠돌이 생활을 하느라 학교조차 다니지 못하다가 컴패션을 만나면서 학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서 해가 지면 기름 램프를 켜고 공부를 해서, 우간다 기독교대학 지역개발학과에 들어갔고, 졸업하면, 조국 우간다가 한국처럼 가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큰 기여를 하고 싶다고 포부를 말했다. 짧은 시간 동안 가난과 풍요를 모두 경험한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이사야만큼은 아니었지만, 학창시절 어렵게 공부하면서 가슴에 품었던 꿈, 그 열망의 온도를 요즘 아이들이 경험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게 아쉽다.
그러고 보니, 꿈꾸기 좋은 환경은 차라리 풍요롭지 않은 쪽인 것도 같다. 다만, 꿈꾸기보다 꿈을 펼치기에 좋은 환경에 살고 있는 다음세대에게 고백하건대, 지난 시절 우리 어른들의 꿈에는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절박함은 있었지만, 모두가 더불어 행복해지기 위한 목표인식은 부족했다. '이웃'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 왜 공부를 해야하는지, 커서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아이들에게 대신 부탁하고 싶다. 윗 세대가 놓친 '이웃'에 대해 고민하고 그와 관련된 꿈을 발견해 보라고. 그 안에 얼마나 사람이 필요하고, 할 일이 많은지 알게 되면, 꿈을 꿔야 하는 이유를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