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본래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민족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라는 특성은 무술(武術)에 무능하다거나 위기 상황에서 뒤로 물러나는 나약성과 연관되는 게 결코 아니다. 우리는 강한 무혼(武魂)의 민족이다. 불굴의 의지로 내 땅과 가족을 지키며 숱한 외침에 대항한 민족이 아니던가!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에는 고려시대 대몽 항쟁의 중심지인 처인성이 있다. 고려1232년(고종19년) 어느 날, 처인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처인성을 수비하는 장수는 김윤후 승군장이었다. 상대는 당대 최강의 몽골군으로 정예 10만의 막강한 기마군단. 총사령관 살리타는 몽골대제국 황제 칭기즈칸의 넷째 아들이었다. 고려 정규군은 숫자로도 1만여명이 채 되지 않았고 나머지 군사는 승려부대와 처인부곡의 민중(민초)들로 구성된 의병들이었다. 군사훈련이나 전투 경험이 전무하거나 지극히 부족한 병사들이었다.
승산이 없는 전투였다. 그러나 장군은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몽골군대를 가까운 거리까지 유도한 후 화살 한 방에 적장을 거꾸러뜨리는 일발필살의 공격을 가했다. 결국 이날의 전투는 기적적인 대승으로 마무리됐고 이후 장기적인 몽고 항전을 가능케하는 결정적인 승기를 잡는 전투로 역사에 남는다.
처인대첩은 종교인과 처인부곡민이 표출한 민중의 힘으로 가능했다. 그 힘을 이끌어낸 것은 화살 일발로 적군 총사령관 '살리타'의 심장을 명중시켜 거꾸러뜨린 승군장 김윤후의 탁월한 전술 전략과 용맹의 리더십이었다. 김윤후 장군의 승전은 먼 후일 조선조 서기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승군도총섭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영규대사, 처영대사로 이어지는 승군과 승군장의 역사적 단초가 되어 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조선조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승군장 김윤후 장군의 불멸의 업적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역사속에 묻혀버렸다. 조선은 문(文)을 편향적으로 숭상하는 나라로 발전하면서 무(武)를 숭상하는 이웃 일본의 침략에 엄청난 국난을 당하고 결국에는 나라를 고스란히 넘겨주는 국치까지 입게 된다.
처인대첩 779년이 흐른 올해 우리 용인시는 김윤후 장군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후세에 호국정신을 일깨우는 계기로 삼기 위해 10월 15일부터 17일까지 사흘간 처인성 문화제를 개최했다. 10월 14일에는 처인성 전투에서 순국한 영령들을 모시는 위령제례도 열었다. 필자는 초헌관이 되어 제례복을 입고 제례를 올리는 영광을 누렸다.
필자는 처인성문화제야말로 용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가장 뜻깊은 축제라고 여긴다. 용인(龍仁)이라는 이름이 바로 '용구현(龍駒縣)' 의 용자와 '처인(處仁)'의 어질 인(仁)자를 결합하여 조선조 태종대에 정해진 것이다. 지금 용인시의 3개구 가운데 한 곳인 처인구의 명칭도 처인성의 명칭에서 유래한다. 처인은 '어진 사람이 사는 곳'이란 뜻풀이도 된다. 그래서 필자는 처인성을 상기할 때마다 어질면서도 위기 상황에서 분연히 일어서는 패기만만한 용맹성이 우리 용인시민들의 뿌리이며 본성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오는 2014년이면 용인지명의 역사가 600년이 된다. 용인시는 용인지명 역사 6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처인성을 안팎으로 새롭게 정비하고 있다. 성 내외부 보행로를 정비해 유적 탐방로로 사용하고 성벽을 따라 조명을 설치해 야간에도 유적을 조망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또 광장과 야외전시장 등을 만들어서 처인승첩 교육·체험의 장으로 삼고 처인성 문화제와도 연계해 지역 경제와 문화 발전에 기여하도록 할 방침이다.
처인부곡민의 무혼과 용장(勇將) 김윤후 장군의 리더십이 살아흐르는 처인성을 용인시의 성지로만 아니라 국가의 성지로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