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화를 마치고 차를 몰아 아주 오랜만에 부부가 집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외국계 대형마트로 장을 보러갔다. 연말에다 주말이라 그런지 인산인해다. 주차시간만 40분이 걸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번잡은 있으나 혼란은 없었다. 세련된 옷매무새와 나름대로 교양을 지키려는 행동거지가 그들이 타고 온 깔끔하고 고급스런 차량과도 어울린다. 고급 외제 차량이 더 이상 눈총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정도로 흔하다. 잘 진열된 넘치고 넘치는 세계 각지의 온갖 상품들은 여느 미국상점 못지 않다. 사람들은 오로지 소비를 위해 태어난 것처럼 나름대로의 합리적 선택 하에 손수레를 넘치고 미어지게 채운다. 될 수 있으면 이곳에 오지 말자고, 동네시장 살리는 '착한 소비'하자고 다짐하는 우리 부부도 별 수 없이 무리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이 곳 그 어디에도 전쟁의 공포는 없다. 풍요의 시스템이 안착된 모습이다. 정부가 그리도 자랑하는 G20 국가인 선진 조국의 모습이다.
귀가 길에 차가 동네 국밥집 앞을 지난다. 바로 이 주일 전, 오 사장님이 내게 울먹이며 도움을 청한 바로 그곳이다. 오륙년 전 우연히 인력 소개소를 통해 알게 된 이후, 60대 후반의 그는 한 달에 한 두 번꼴로 나와 삽질을 같이하며 '노동의 우의'를 다진 사이가 되었다. 얼치기 전원 생활자가 제대로 된 고수를 만난 것이다. 교수치고는 꽤나 노동에 익숙한 내게도 그의 삽질은 삽질이 아닌 예술이었다. 온 몸이 일하는 감각으로 총무장된 강력한 노동 무기체계 같았다. 그는 겸손하고 성실하였으며 하루 일당 십 만원을 손에 쥐고는 환히 웃는 얼굴로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라는 말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주말 이슥한 밤, 텅 빈 식당에서 우리 부부를 앞에 두고 하루 종일 굶었음에도 밥술을 넘기지 못하고 깊게 파인 주름위로 흐르는 눈물을 훔쳐대기만 하였다. 평생 노동으로 투박해진 손가락 중 한 마디가 없는 것을 보니 더욱 가슴 아팠다. 40년 노동으로 십 수 년 전 읍내에 외아들 이름으로 사놓은 집을 '그 놈'이 강원랜드에서 날리고도 모자라 감옥에 가 있다는 것이다. 집도 절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홀몸으로 길거리에 나앉은 '노인급' 노동자에게 일거리 없는 겨울은 잔혹하였다. 관청은 기다리라고만 하였고 시간이 지나자 지인들은 눈총을 주었다. 국회에서 삭감된 서민예산이 날치기 통과될 즈음 그는 영하 십 몇 도의 혹한을 공원 화장실에서 버티고는 내게 도움의 전화를 한 것이다.
1960년대 이래 지난 50년간 대한민국은 잘 살아보자고 앞만 보며 치달았다. 박정희의 유신시절 표어대로 '한 손에는 삽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총을 들고' 반공과 경제성장을 국시(國是)로 우리는 예까지 온 것이다. 2010년 세밑 내 눈에 비친 세 가지 한국적 근대화의 풍광이다.
추신: 오 사장님은 아무리해도 연락이 어렵다. 일단 한 달 치 버틸 돈을 쥐어주며 방도를 찾아보자고 위로하였지만 그가 가방에 가지고 다닌다는 노끈을 빼앗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