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공부 초창기의 그 신선했던 의문들이 시들해진 것은 아닐지라도 그다지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한 편으로는 우리가 좀 살게 되니 문제의식이 희박해진 연유도 분명 무시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하면 서양식(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여 미국식) 공부가 내게 심어준 기본 가정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연유 또한 못지않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근대성(modernity)이라 부르는 경쟁적 시장, 민주적 정치, 세속화된 사회에 대한 의문 없는 칭송이 바로 그런 가정에 속한다. 한 마디로 서양이 잘 사는 것은 근대성을 일찍이 획득한 덕분이니 그 연장에서 한국이 서양 아니, 미국 비슷해지면 좋은 것이라는 바로 그 생각 말이다.
그런데 시들해진 나의 옛적 질문들을 환기시키는 일들이 요즈음 심심치 않다. 아주대학교 국제대학원에는 주로 3세계 출신의 외국인 대학원생이 120여명이나 된다. 영어로 진행하는 '발전론' 강의에는 이들 뿐 아니라 유럽에서 온 외국인 교환학생들도 적잖다. 이들이 한결같이 던지는 질문이 바로 "그렇게 가난하던 한국이 어떻게 이리 잘 살게 되었는가, 앞으로도 이렇게 아니 더 잘 살게 될 것인가"이다. 한국이 서양처럼 정치, 경제, 사회적 측면에서 근대성을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한국적인 특수성과 세계사적인 보편성의 독특한 조합이 어쩌구 저쩌구 설명해대지만 이들이 얼만큼 내 설명을 알아듣고 공감하는지는 미지수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장하준 교수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라는 책을 출간하여 내 고민을 좀 덜어주었다. 익히 그의 생각의 둘레와 향방을 짐작하고 있던 터라 단숨에 독파한 23가지 주제는 별로 신선하지는 않았다. 독창성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그가 거명하였던 여러 선각자에 비하면 특히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의 지적은 매우 유용하였고, 시의적절하였으며 또한 호소력이 컸다. 내가 30여 년 전 품었던 질문과 내 외국인 학생들이 던진 질문들에 대하여 명쾌하게 답하였다. 한 마디로 선진국들이 시키는 대로가 아니라 선진국들이 하였던 대로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유무역과 국가 규제가 없는 경쟁적 시장을 주창하는 선진국들도 예전에는 보호무역과 국가 개입이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는 말이다. 즉, 근대성이나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근대성이고 어떤 자본주의냐가 보다 적절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 장하준은 박지원과 유길준을 뛰어넘은 훌륭한 후학이다.
그렇다고 일부 호사가들의 예언과는 달리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그가 노벨 경제학상 후보 반열에 들기는 힘들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일부 진보적 경제학자가 지적하듯 장하준이 친재벌적이라는 지적에는 더욱 공감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공감하지 않는 것은 그의 실력이 하찮기에 서울대 교수가 되기 힘들다고 세 차례나 거부하였다고 전해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장 교수를 만나면 정말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다. 당신은 왜 그렇게 서울대로 오고 싶어 하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들은 왜 그렇게 반대하는가? 케임브리지 대학이 더 좋은데(?) 말이다. 정말 멍청한 질문이지만 동시에 멍청하지만은 않은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