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정진오기자]죽산 조봉암 선생을 '국가 변란을 꾀한 간첩'이란 누명을 씌워 억울하게 죽인 이승만 정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죽산의 죽음 이후까지 철저히 통제하고 짓밟았다. 1959년 7월 31일 처형당한 죽산의 시신은 그의 서울 충현동 집으로 옮겨졌다가 8월 2일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혔다. 문상객까지 철저히 검열하고 차단시킨 당국은 장지에 봉분을 만드는 것까지 막았다고 한다. 또 삼우제마저도 지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강화에 사는 창녕 조씨 종친으로 당시 장례식에 참석했던 조석묵(90) 할아버지는 "경찰이 장지까지 통제하고, 봉분도 만들지 못하게 해 할 수 없이 평평하게 묘를 썼고, 삼우제를 지내려고 준비를 다 해서 갔는데 그때도 형사들이 와서 제사를 막는 바람에 그냥 돌아와야 했다"고 했다.
당국의 '죽산 조봉암 죽이기'는 이때부터 연좌제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1980년까지 계속됐다. 가족들은 이때까지 정권 차원의 압박과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죽산은 숨을 거둘 때 맏딸 호정(31), 둘째 딸 임정(13), 외아들 규호(10), 막내딸 의정(9)씨 등 1남3녀를 뒀다.
특히 호정씨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이었다. 그의 남편은 영화감독이면서 한국예총 회장도 지낸 고 이봉래 선생이다. 장인이 '간첩'으로 사형을 당한 뒤 이 감독은 누구보다 극심한 검열을 받았다고 한다. 예총 사무실에는 형사들이 상주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당국의 '죽산 압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린 아들이 커서 군대에 가는 것도, 취직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군입대 통지서를 받고 입대를 하려고 했는데, 정보 당국에서 입대를 막는 바람에 1년 이상 늦게 군대에 갔을 정도였단다.
아들 규호(63)씨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지 않았겠냐"면서 "아버지는 언제나 오실까 그리다 보니, 꿈에 나타나실 정도였다"고 했다. 그 뒤에 고생한 것과 아버지를 정권에 '빼앗긴'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죽산 조봉암 '무죄판결' 햇빛으로 걸어나오다·4]남겨진 가족들
'죽음이후'까지 짓밟는 끝없는 통제… 봉분 불허하고 삼우제도 못지내게…
입력 2011-01-27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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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8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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