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최용신 선생이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처음 샘골에 나타났을 때 주민들의 반응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주민들은 "책상물림의 젊은 처녀가 무엇을 안다고 저러는가"라며 핀잔만 주었다. 후원을 요청하러 찾아간 사회운동가마저도 그에게 "날고 기는 놈도 농촌에서 실적을 내지 못하는데 네가 무엇을 한다고 하느냐"며 차디찬 경멸을 보냈다. 여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밭에 나가 밭 매는 주민 옆에 쭈그리고 앉아 말없이 일손을 도왔고, 야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불과 7개월이 지나지않아 주민들은 그를 마을에서 꼭 필요한 인물로 여겼다. 최용신은 부녀자들과 마을 청년들을 지도하며 몸을 아끼지 않고 샘골 곳곳을 다녔다. 그의 손길과 마음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강습생은 점점 늘어났으며, 강습소가 좁아 들어오지 못하는 아이들은 교실 밖에서 글을 배웠다.
강습소를 증축하기로 하고 건립 기금을 모으자 부인들은 그동안 어렵게 모은 돈 300원을 선뜻 내놓았다. 최용신은 그 돈의 반을 부인회에 돌려주었다. 여러분의 피와 땀이 담긴 이 돈을 다 받을 수 없다며. 여기에 감동한 주민들에 의해 모금 활동은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최용신은 마을에 온지 1년이 조금 지난 기간 안에 주민의 힘을 모아 강습소 증축공사를 마무리 하였다.
이듬해 최용신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으나 병을 얻고 고향으로 돌아가려하나, 드러누워 있더라도 샘골로 오라는 주민의 요청을 받아들여 샘골로 돌아간다. 그러나 얼마 있지않아 1935년 초 최용신은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샘골마을에서의 과로가 한 원인이 되었으리. 마을 주민들은 그의 장례를 1천여명의 조문객이 애도하는 속에 사회장으로 치렀고, 강습소가 보이는 곳에 안장하였다. 최용신 이야기가 알려지자 신문과 잡지는 앞다투어 그에 대한 기사를 다루었고, 소설가 심훈은 소설 '상록수'를 써서 세상에 내놓았다.
최용신이 떠난 지 80여년이 지났으나, 나이 든 제자들은 선생님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재산을 최용신기념관을 짓는데 기부하고, 또다른 이는 사재를 털어 길바닥에 기념 표석을 심었다. 주민들은 지금 최용신마을 만들기를 하고 있다. 최용신기념관에는 지금도 그를 기억하고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무엇이 냉소적이던 당시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는가? 무엇이 그가 떠난지 80여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기억하게 만드는가?
최용신이 한 일이 우리 역사를 바꾸어 놓은 대단한 일은 아니나, 그가 보여준 행동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최용신은 주민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헌신하였다. 소통을 통해 공감을 얻었다. 사랑과 격려를 통해 아이들의 미래를 바꾸어 놓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최용신이 설정한 비전을 자신의 비전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실천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최용신과 주민들, 그리고 아이들은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으며, 8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공동체에 대한 기억이 제자와 당시를 기억하는 주민들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역사를 살아간 인물의 삶 속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많다. 최용신의 삶은 한 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