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승현 (가천의과학대 사무처장 겸 교양학부 교수)
[경인일보=]꽃샘추위 속에서도 봄은 어김없이 오고 있다. 부지런한 걸음이다. 도심 여기저기에서도 꽃단장이 한창이다. 시민공원은 봄맞이에 여념이 없고, 겨우내 갈라진 도로를 보수하는 작업도 분주하다. 산과 들에도 깊이 응달진 골짜기에 잔빙(殘氷)이 조금 남아있을 뿐, 봄 기운이 완연하다. 올 봄은 지난 겨울 혹한과 폭설, 게다가 축산농가를 휩쓴 구제역 충격으로 유난히 기다리던 터다.

그러나 그 봄의 초입에서 목도하게 되는 일본 열도의 비극은 우리들의 기대를 송두리째 앗아가고 있다. 연일 말을 잃게 만든다. 자연의 위력 앞에 겨울, 봄과 같은 계절의 순환은 호사에 가깝다. 지진과 쓰나미를 확률과 통계에 의존하고 있는 21세기 과학문명의 한계는 겸허함을 넘어 초라한 느낌마저 들게한다.

TV에 비친 쓰나미의 참상은 전쟁영화를 왜소하게 만드는 충격이었다. 거대한 배가 도로 위에 걸쳐있고, 수백 대의 자동차가 양철판처럼 구겨져 휩쓸려가는 화면은 경악이었다. 도시가 온통 뻘밭으로 변해버린 모습을 접하고서는 '저 곳에서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있을까'하는 회의감마저 들었다. '당신 없이 살려고 하지 않았다'고 생사도 모른 채 나흘만에 만난 부부의 통곡에서는 오히려 전율이 느껴졌다.

후쿠시마 원전도 1·3호기 원자로 외벽 폭발에 이어 2·4호기도 심각한 폭발이 일어났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일본 국내는 물론 주변국까지 초긴장 상태이다. 피폭 주민들도 생겨나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엔 바람의 방향과 농산물 오염을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안전지대는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이번 지진이 일본 해안선을 4m 동쪽으로 움직이게 만들고, 지구자전축을 10㎝ 이동시켰다고 하니, 그 위력을 짐작할 만하다. 이 정도면 인간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치명적 상황이라고 말한다. "쓰나미가 닥쳐올 때 인간이 살 수 있는 길은 미리 피해 달아나는 것 뿐"이라는 지진 연구학자의 전언은 거의 공포 수준이다. 실제 바닷속 진앙이 육지와 가까울 때는 지진과 동시에 쓰나미가 해안 마을을 덮친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일본의 방재시스템이 세계 최고 수준이니까 피해가 이 정도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대지진으로 주저앉은 일본을 위로하고 지원하는 일은 당연하다. 한류 스타들이 먼저 트위터와 페이스 북을 통해 일본 팬들에게 아픈 마음을 전하면서 '도울 방법을 찾겠다'는 글을 줄지어 올리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최근 현빈이 해병대에 입대할 때도 멀리 포항까지 발걸음을 마다하지 않은 일본 팬들이다. 이제 그 이웃나라 팬들에게 사랑을 돌려줘야 할 때다. '겨울연가'의 배용준과 인기 걸그룹 소녀시대의 약속은 큰 힘이 될 것이다.

일본과 우리는 애증이 교차하는 파란의 역사를 나누고 있다. 묘한 감정이 뒤섞여 있다. 국제경기에서 일본이 우리 아닌 다른 나라와 겨뤄도 선뜻 응원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인가. 벌써부터 몇몇 지도자들의 말실수가 인터넷에 오르내린다. 예부터 이웃이 슬픔에 잠겨있을 때는 말을 가려서 했다. 국가간에는 극진한 예를 다했다. 평소에 자주 했던 말이라도 고깝게 들려 국가간 갈등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쓰나미가 아름다운 일본의 해안도시를 강타한 다음날, 지인들과 저녁 모임에서 예전에 책 광고에서 언뜻 본 듯한 '일본 열도의 미래'가 화제로 올랐다. '영토의 대부분이 바다 속에 잠긴다' '지축이 수직이 된다'는 둥 한때 호사가들 사이에 회자됐던 미래예측서가 재밋거리로 등장했다. 호기심과 장난기까지 막을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바탕에 깔린 복잡 미묘한 정서가 늘 마음에 걸린다.

우리는 "딸의 손을 놓쳤다"고 울부짖는 한 일본인 엄마의 눈물과 고통을 우리의 것으로 느껴야만 한다. 이 상련(相憐)이 먼저다. 정성어린 손길이 진정한 인도주의다. 범부(凡夫)들의 관계도 그러하듯, 애도와 조문이 국가간 관계를 깊고 넓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곧 도쿄 우에노(上野) 공원과 황궁옆 치도리가우치(千鳥ヶ淵) 공원에는 벚꽃이 만발할 것이다. 일본 벚꽃은 유난히 희고 곱다. 일본이나 우리나 봄은 항상 새롭고, 화사하다. 생명의 숨결이 거세고, 꿈으로 들뜬다. 대재앙에도 침착하고 차분한 일본이, 이 봄, 꺼지지 않는 생명력으로 힘차게 일어서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