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구 (중앙대 미술학부 교수)
[경인일보=]최근 지역사회에서 평화에 대한 담론이 활기 있게 진행되고 있다. 평화 담론은 이미 지역 정체성의 핵심으로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으나, 지난해 서해안의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남북한 긴장이 더욱 커지면서 활발해 진 것이다. 이는 지역사회를 살리는 자구책이라는 현실적 측면과 향후 인천시가 지향해야 할 역사적, 민족적, 철학적 당위성을 가진 화두라는 점에서 지역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지난 해 송영길 인천시장은 서해 5도 해역을 서해평화협력지대로 구축하겠다고 밝힌 바 있으며, 이는 지난 2007년 남북 정상이 체결한 10·4 공동선언의 구체적인 실행 선언의 의미를 담고 있다. 또 며칠 전 평화도시 인천만들기 시민단체 연석회의 등은 서해 앞바다의 긴장 완화와 인천의 발전, 나아가 새로운 평화전략과 동북아시아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평화도시 인천 만들기 사업'을 본격 추진키로 결의한 바 있다.

여기에다 지난 1월 인천 출신 정치인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해 52년 만에 대법원으로부터 국가변란과 간첩혐의가 무죄 선고됨으로써 역사적인 복권과 부활을 하게 된 점도 지역사회에 평화 담론의 불씨를 새롭게 지피는 계기가 됐다. 죽산은 일찍이 한반도의 복지와 평화를 고민하며 평화통일론을 주창한 21세기의 선각자였던 것이다.

'평화'는 이제 확실하게 인천의 아이콘으로 부각되었다. 인간에게 개인적으로 최고의 덕목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인류 집단에게 가장 큰 덕목은 평화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는 개인과 국가, 민족 간의 이기적인 욕망과 목적에 의해 전쟁으로 유린되고 온전하게 지켜지지 못해 왔다.

한편 평화가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라는 점에서 일찍이 많은 예술가들은 전쟁을 고발하며 평화를 염원하는 작품을 남겼다. 예술가란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대보다 파괴와 상처가 난무하는 시대일수록 예민한 촉수로 그것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능력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나 고야의 '전쟁의 참상', 피카소의 '게르니카' 등은 그것의 산물이다. 독일의 여성화가 케테 콜비츠도 반전과 평화를 호소하는 많은 판화를 남겼으며, 폴란드의 동시대 작곡가 펜데레츠키는 '히로시마의 희생자를 위한 비가'를 작곡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인훈의 '광장', 김원일의 '어둠의 혼', 황석영의 '손님',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의 소설과, 미술작품으로 신학철의 '한국근대사', 강요배의 '제주 4·3연작'이 있는데, 특히 임옥상은 화성시 매향리의 미군 전투기 사격장에 버려진 포탄을 모아 조각을 만드는가 하면, 심지어 살육의 상징인 포탄을 녹여 생산의 도구인 보습을 만드는 등 남다르게 반전평화를 주제로 한 작업을 많이 했다.

한편 5년 전 평택시 대추리에서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예술가들이 모여 벌인 대추리지키기 예술운동도 비록 그 성과물들이 본격적인 비평의 대상에 놓여있지 않았더라도 우리에게 평화를 위한 예술운동의 소중한 성과로 기억될 만하다.

사실 예술이란 정치나 경제와 달리 당대 인간의 삶에 직접적인 파급력이나 영향력을 주기에는 그 형식이 일차적으로 미미하다. 그러나 기억과 상상력을 통해 인간의 삶과 역사를 구성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은 오히려 정치나 경제를 압도하는 힘을 가졌다.

이즈음, 이러한 예술의 역할이 오늘날 지역사회의 평화 담론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앞서의 근거로 지역사회가 평화운동의 중심이 될 수 있는 당위성을 가졌다면, 그에 비추어 평화를 위한 예술운동의 진원지가 되는 것도 큰 당위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마침 목적과 내용이 모호하여 그동안 지역사회로부터 비판받던 인천여성비엔날레가 금년도 회를 마지막으로 폐지된다. 이를 계기로 인천의 정체성을 담고 인천이기 때문에 가능한 새로운 미술행사가 무엇일지 지금 지역의 문화예술계가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그 화두를 평화를 위한 예술, 평화를 위한 미술제전이라면 어떨까 제안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