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명구 (아주대 교수)
[경인일보=]나는 일본 언어에 대체로 무지하고, 가깝게 견해를 나누는 일본인 친구도 별로 없고, 일본의 사상가로부터 정신적 세례를 받아본 적도 없고, 일본은 평생 고작 네댓 차례 방문이 전부인 한국의 대학교수다. 매우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의 일본에 대한 가장 강력한 느낌은 한 일 년 반 동안 타본 꽤 오래된 일본 중고자동차의 성능과 내구성이 참으로 믿을만하다는 평가로부터 유래한다. 한국의 대학교수도 대체로 지식인 그룹에 속할 수 있다는 넉넉한 기준치가 적용된다면, 나의 일본에 대한 지식과 관심은 아마 한국 지식인 그룹의 중위권을 결코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스스로에게 매긴 후한 점수다.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더 나아가 인종적으로 멀면 멀었지 결코 가까울 수 없는 미국이나 유럽에 대한 나의 관심과 어느 정도 지식에 비하면 일본에 대한 이런 대체적 무관심과 무지는 참으로 놀랄만하고 동시에 창피한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 무관심과 어느 정도의 무지가 항상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특히, 이번 일본의 대참사와 같이 평소에 잘 일어나지는 않지만 한 번 일어나기만 하면 한 사회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드는 격변 상황에서는 기존의 지식이 오히려 문제의 정확한 해석과 해결 방안 찾기에 방해가 되는 수가 많다. 전문가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향성으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로 시장 만능주의 외골수 경제학자들을 비판적으로 칭하는데 사용되는 이른바 '훈련받은 무능력'(trained incapacity) 이라든가 혹은 '합리적인 바보'(rational fool)는 지역 전문가도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일본 대재앙 관련 한국 언론의 보도 중 편견의 진수는 '일본 열도 침몰론'이었다. 주로 섣부른 국수주의적 견해를 반영한 이런 방향 설정은 비전문가인 내가 보아도 다분히 선정적이다. 아주 나쁘게 해석하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은근히 실려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하고 아주 좋게 해석해도 동정적 편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일본 포기하지마!'라는 헤드라인을 대문짝만하게 달았다는 어느 영국 신문과 너무 대조적이다. 이런 부류의 보도 주체들이 평소에는 다분히 친일본적인 역사 해석과 보도 경향성을 은근히 또는 대놓고 견지해 왔다는 점에 있어서 자못 이채롭다.

'일본 열도 침몰론'에 대비되는 해석의 전형은 '동아시아 공동체론'으로 총칭할 수 있는 또다른 여론의 희망적 흐름이다. 핵심은 한국과 중국이 일본의 대참사 극복을 적극적으로 돕다보면 이런 협력이 단초가 되어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 있어 화해 무드가 조성될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이다. 그 결과 과거 역사의 아픈 상처를 딛고 유럽연합을 넘어서는 세계에서 최고로 활력이 넘치는 지역공동체가 가능하다는 야무지고 당찬 기대까지 숨기지 않는다. 이와 같은 숭고한 낙관적 기대는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으로부터 발원하여 한-일 양국의 진보적 시민사회에 점차 뿌리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 벌어지고 있는 독도 관련 일본 역사 교과서 대응 방안이나 일본 산업에 종속적인 한국 산업의 현주소를 생각하면 아직은 아득함을 지우기 힘들다.

일본을 잘 모르는 내가 그나마 제 나름 그럴듯하다고 판단하는 두 가지 사실을 소개한다. 첫 번째는 가수 김장훈의 판단이 나보다 낫다는 사실이다. 독도를 생각하면 마음은 굴뚝같지만 쉽게 성금모금에 동참하기 힘들다는 가수 김장훈과 단순한 생각에 덜커덩 10만원 성금을 낸 나와 둘 중 누가 더 현명한가? 명색이 공영방송이라는 KBS가 호들갑을 떨며 생방송한 일본돕기 모금 음악회를 보니 그런 의문이 더 들었다. 두 번째는 일본의 관료제는 참으로 문제라는 것이다. 매뉴얼이 문제가 아니라 답답함과 보신, 감추기가 문제다. 특히, 후쿠시마 원전문제를 다루는 일본 관료제를 보면 왜 관료사회의 민주적 통제가 필수적인지 절감하게 된다. 아울러 우리는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를 자문해보니 모골이 송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