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일 오후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 임시보건지소에서 열린 '가천의대길병원 연평도 지역주민 무료검진'을 찾은 주민들이 검진을 받고 있다. 8일부터 이틀간 실시된 이번 무료검진에 90여명의 주민들이 찾아 무료검진을 받았다. 연평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경인일보=연평도/임승재기자]"참담했죠. 그때만 생각하면…."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34분. 북한이 연평도에 무차별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평온했던 섬마을 곳곳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주민들은 살기 위해 삶의 터전인 고향땅을 등지고 피란길에 올라야 했다. 어선을 타고 섬을 빠져나오는 주민들의 행렬은 늦은 밤까지 계속됐다. 포격 당일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구조활동을 위해 연평도로 향한 이들도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이 길병원 응급의학과 전문의 이수복 (31)교수다.

지난 8~9일 의료봉사 활동을 위해 연평도를 다시 찾은 그에게서 마을 전체가 공포에 휩싸인 당시 긴박했던 현지 상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북한의 2차 포격 직후 길병원 의료진의 연평도 투입 결정이 내려졌다. 이 교수도 일행에 포함됐다.

"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했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이 교수는 다른 의료진과 함께 바로 연안부두로 향했다. 배를 타기 위해 119구조대원들과 함께 대기하던 중 어느 정부기관에서 지침이 내려왔다고 한다. 연평도에 가고 안 가고는 개인이 자율적으로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이 교수는 "위급상황이니 한 마디로 책임을 못진다는 의미였을 것이다"며 "하지만 여자 간호사 한 명을 빼곤 의료진 모두 연평도에 들어가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했다. 이 교수 일행이 화물선에 오른 것은 그날 밤 11시경이었다. 주민들이 탄 어선이 연안부두로 속속 들어오고 있을 때였다.

이 교수 일행은 다음날 새벽 4시가 돼서야 연평도 선착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교수는 "마을과 부두는 전기가 대부분 끊겨 칠흑같이 어두웠다"며 "선착장엔 군인들이 쫙 깔려있어 긴장감이 감돌았다"고 했다. 화재가 난 마을 곳곳에선 여전히 시커먼 연기가 계속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교수 일행은 바로 연평면사무소에 임시진료소를 마련했고, 119 구조대원들은 잔불을 제거하러 나섰다. 면사무소엔 섬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배가 있는지, 가족과 친인척들의 생사 여부를 묻는 전화가 밤새도록 빗발쳤다.

이 교수는 "전화가 되는 곳은 면사무소가 유일했다"며 "휴대전화와 인터넷은 물론 물도, 전기도 끊긴 상태였다"고 했다.

포격 다음날 아침 면사무소에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교수는 "날이 밝자마자 주민들이 몰려와 대책이 뭐냐며 따져 물으며 큰소리를 쳤다"며 "다들 흥분해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지난 밤 미처 섬을 탈출하지 못한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낡고 비좁은 대피소에서 공포에 떨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부상당한 주민들은 겁에 질려있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포격 당시 창틀이 등으로 떨어져 척추가 골절되고, 무언가에 의해 이마가 찢겼거나 심지어 협심증이 의심돼 병원 이송이 시급한 주민도 있었다. 이 교수는 "약품과 의학장비를 충분히 준비해 올 여건이 안돼 걱정을 많이 했지만 천만다행으로 아주 큰 중환은 없었다"며 "낮에 짬을 내 돌아본 마을은 전쟁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참담한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