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까지, 부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만족만을 위하여 쓰는 돈은 어느 정도 쓰고 나면 더 이상 쓸데가 없었다. 돈이 아무리 있어도 외제 승용차를 살 수가 없고, 외제 명품도 수입이 안 되니 밀수된 물건뿐이었다. 그러니 명품이 있어도 보란 듯이 대놓고 자랑할 수 없었던 거다. 괜찮은 물건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불법 '양키물건'이 다였다. 그러던 것이 수입자유화, 여행자유화가 되면서 세계적 명품을 소비해 보니 부자들은 돈맛을 만끽하게 되고, 일반 대중들도 돈쓰는 짜릿함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경제 개방과 연이은 자유무역협정은 한국의 소비를 세계화하는 종결자라고 할 만하다.
상품을 소비하듯 돈을 버는 것도 세계화가 되고 있다. 핫머니, 해외투자펀드는 물론이고 돈만 있으면 우리는 주식시장에서 외국 기업의 주주가 될 수 있다. 삼성전자, 포스코, 국민은행 등 잘 나가는 대한민국 기업들이 버는 돈은 절반 이상이 외국인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이러니 자본과 기업에서 국적을 따지는 것이 고루해졌다. 인천에 있는 한국지엠자동차회사와 미국 앨라배마에 있는 현대자동차회사 중 어느 쪽이 한국인들에게 도움을 더 줄 것인가는 명약관화하다. 미국 회사인 한국지엠이다. 우리가 삼성전자를 평가하는 건 대한민국 회사라는 애국심의 맥락보다 고용 기여가 훨씬 커다란 요인이 아닐 성싶다. 삼성전자는 대표적인 다국적기업이다.
요즈음 기름값 100원 내리기가 세상관심사이다. 가격은 경제상태를 나타내는 온도계와 같다. 소비자의 지불의향액과 생산자의 수용의사액이 시장에서 균형과 조화를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최근 기름값 인하는 누군가가 온도계에 억지로 찬바람을 불어 넣어 온도를 끌어내리는 모양새로 비추어진다. 그것도 석 달만 그렇게 한다고 한다. 비경제적인 손길에 휘둘리다가 경제온도계의 기능이 망가지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그 '누군가'가 이런 걸 모를 리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경제보다 더 중요한 이해관계를 우선해야 한다고 판단을 했으리라. 기름값이 100원 내리면 소비자물가가 0.2%포인트 가량 내릴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런데 이번 기름값 인하는 구성이 난삽한 블랙코미디를 보는 듯하다. "기름값이 묘하다. 인하 검토해 보라"며 대통령이 운을 뗐다. 전직 회계사 출신인 주무 장관이 기름값 분석은 자기 전공이라며 기염을 토하며 장담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사결과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정유사는 일률적으로 '가격인하 담합'을 했고 장관은 국민부담을 나누겠다는 상생의 정신을 높이 산다며 화답했다. 이 극의 피날레는 정유사의 고통과 정부의 찬사가 무색하게 주유소에 가면 기름값은 거의 변동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니 주유소에서 소비자들은 혀를 끌끌 차며 냉소적이 될 수밖에. 모처럼 국민들의 마음을 살 수 있는 호기를 놓쳐버린 근본 원인 중 하나는 정부가 가진 경제주권의 폭이 개방화로 대폭 좁혀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경제개방의 정도로 따지면 대한민국은 세계 최상위권이다. 덕분에 다양한 소비와 글로벌한 재테크가 가능해졌지만 우리는 이제 대한민국 경제를 흔드는 다수의 국내외 경제시어머니들과 동거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필자가 근무하는 연구원에서 10여 분 오르면 철마산 작은 봉오리에 닿는다. 거기서 가장 편안한 시야가 확보되는 지점은 정상이 아닌 8부 능선 가량이다. 가장 크고 가장 많고 가장 높은 것이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이 아닌 게 세상살이인 듯하다. 기름값 사태를 보면서 8부 능선 경제전망대를 생각해 본다.
※ 알림
경제전망대 필진이 바뀌었습니다. 조승헌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은 대통령지속가능발전위원회 갈등조정위원, 행복경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저서로 '행복을 디자인하라'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