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방부 (가천의과학대 부총장·석좌교수)
[경인일보=]'국가가 필요로 하는 고급 과학기술인력을 양성하고 연구 중심대학의 모델을 제공키 위해… 미래는 한국만이 아닌 세계 과학계가 선망하는 대학 최초의 발명, 최상의 교육, 최고의 리더를 찾기 위해 세계가 눈을 돌리는 최고 수준의 대학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설립이념이 과학기술대학(KAIST)의 설립이념이다. 필자가 서두에 이 글을 쓴 것은 최근 '카이스트'문제가 사회에 특히 언론에 집중 조명된 때문이다. 대부분의 비판은 긍정적보다 부정적인 것이 많았다. 더욱 가슴 아팠던 것은 소위 국회가 '카이스트'를 비판하고 교육과 철학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학생 4명이 생명을 버린 것과 학사운영상 등록금 차등제 등이 집중 포화의 대상이었다. 오랜만에 의과대학 동기생들과 모임이 있었다. 서로 정담을 나누던 중 몇몇 친구가 '카이스트' 얘기를 화제에 올렸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또 자살, 언론의 비판 등등을 얘기하면서 좀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 같으면 다 죽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지난 의과대학 시절을 회고한다. 필자의 시대에는 중학교 때부터 일류가 정해져서 고등학교 때도 일류 고등학교가 있었다. 의과대학의 입학정원이 70명 정도되면 그 중 3분의2는 소위 일류 고등학교 출신이었다. 자화자찬은 아니지만 각자가 나름대로 공부에는 일가견이 있었고 우수 성적과 우수 졸업생들이었다. 입학 후 고등학교 수업시간의 거의 배에 가까운 수업이 시작되었다. 각종 철학 등 교양과목, 체육, 영어, 독일어, 수학, 화학(유기, 무기), 생물, 해부학, 유전학, 비교해부학, 각 과목의 실습실험 등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꼬박 8시간의 수업시간 +?로 시간표는 꽉 차있었다. 학칙도 까다로워서 3분의1이상 결석하면 시험자격이 없고 소위 2년간의 예과과정 중 F학점이 2이면 본과에 진학하지 못하였다. 한마디로 표현해 아차하면 낙제였다. 물론 교과서는 전부 영어로 된 소위 원서로 1천페이지는 보통이었다. 수업은 전적으로 영어로 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강의 내용은 영어 반 한국말 반이었다. 이뿐이랴. 어떤 과목은 '라틴말'로 의학용어를 썼다. 장황하지만 몇 가지 더 보태어야겠다. 본과에서는 5분의1이상 결석하면 그 과목은 시험자격이 없다. 오전 8시 30분에 시작하는 학과시간에 1분이라도 늦으면 강의실 문을 잠가 버리니 소위 마이너 과목은 아차하면 자격박탈이었다. 공부 스트레스는 느낄 시간도 없었고 오히려 느끼는 것이 사치였고 느끼는 순간 아차하면 낙제였다. 지금도 기억하는 교수님의 한마디가 생각난다. '자네들! 공부 많이 해서 죽은 사람 없네! 공부 안해서는 죽을지 몰라도….'

의과대학의 등록금은 일반대학의 거의 2배정도였다. 지금처럼 장학금의 종류나 기회가 거의 전무한 시대였다. 기껏해야 3·1장학금, 선경장학금, 5·16장학금 정도로 기억될 뿐…대부분 향토장학금(부모님이 주는 돈) 그리고 비교적 많은 수의 동료가 소위 '가정교사'로 용돈, 학비 등을 마련하였다. 필자가 지낸 의과대학시절을 좀 길게 기술하였다. 현재의 KAIST학생들의 공부 정도와 비교하여 우열, 과다 등을 논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또 어떠한 이유로든 생명이 관계되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이번 언론에 회자되는 '카이스트'를 보면서 필자의 의과대학 시절과 비교하면서 느꼈던 단상을 깊이 없이 적어보았다. 인간이 태어나 어떠한 직업과 인생을 가질지 결정하는 것은 누가 뭐라 해도 본인 자신이다. 때로는 우리나라에선 부모의 입김이 더 중요하고 강하기도 하지만…. 일류 중학교, 일류 고등학교 그리고 일류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의사가 되려면 그 과정이 지옥 같든, 천당 같든 겪고 또 참고 극복해야 한다. 만일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하면 다른 직업 또는 과정으로 바꾸든지 아니면 만일 대학에 층이 또 서열이 있다면 다른 층, 다른 서열로 가면 된다. 또 항간에 이런 말 있지 않나 '절이 싫으면 스님이 떠나라고'.

언젠가 한국의 과학과 산업에, 더 나아가 인류의 과학과 산업에 크게 공헌할 인재가 카이스트에서 나와 인류의 미래가 '카이스트'에서 이루어진다는 소릴 듣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