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사회를 연구하는 이들을 당혹하게 만드는 가장 큰 모순의 하나는 영향력이 작은 일상적 일들은 예측과 대비가 가능한데 정작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사건들은 자주 일어나지 않아 예측과 대비가 어렵고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그나마 부분적 설명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인류사를 바꾼 프랑스, 러시아, 중국혁명의 여파부터 시작하여 2008년 전 세계를 강타한 미국발 금융위기, 2011년 일본의 원전사고가 바로 이런 예에 속한다. 물론 이런 어려움은 대지진이나 쓰나미의 예에서 보듯이 자연과학도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인류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자연재해보다는 인간행위의 결과로 나타나는 재해의 위험성이 급증한다는 사실이다. 울리히 벡(Ulrich Beck)이라는 학자는 이를 위험사회의 도래라는 개념으로 집약하였다.
위험사회의 도래가 진정 걱정되는 소이는 알면서도 당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어떻게 이런 대재앙의 전조를 대략은 인지하면서도 대비하지 못하고 당할 수가 있단 말인가?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마도 가장 커다란 연유는 인간이 만든 기술이나 과학적 지식에 대한 지나친 믿음 때문일 것이다. 인간을 달나라로 보내고 거대한 강을 막아 댐을 만들고 체세포 복제로 생명체의 창조주가 될 수 있고 거시경제 이론은 금융위기의 파국을 미리 막을 수 있고…. (그 발상이 매우 유치한 수준이기는 해도) 이런 맹신의 서열상 가장 끄트머리에는 환경을 감시하는 로봇 물고기가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인간의 탐욕과 이를 이용하는 오도된 자기 확신이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경제 성장을 위해서 혹은 보다 편안한 삶을 위해서 '이 정도는 괜찮겠지'를 되뇌면서 자연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높여간다는 점이다. 당연히 불안한 마음이 생기고 경고음이 들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항상 이 때쯤이면 위장된 구세주가 나타난다. 투자 대비 최소 비용의 경제법칙을 들이대면서, 또는 대안이 없다면서, 그리고 또한 위험의 확률을 몇 십 만분의 일로 표시하면서…. 마지막에는 우려의 목소리를 정치적 반대자(우리나라에서 일부 한심한 언론과 정치인들은 이를 흔히 좌파라고 딱지 붙인다)로 낙인찍으면서 자신은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할 소리는 하는 용기 있는 선의의 지도자로 확신한다.
인간 능력의 무궁한 발전을 무시할 수도 없고, 또한 무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아울러 인간의 편안한 삶과 이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 능력에 대한 과신은 의심 못지않게 무지한 것이며, 아무리 지도자들이 나름대로의 진정성으로 위험사회의 불가피성을 역설한다 해도 제 홀로 바르고 제 홀로 옳은 것은 아집이요 독선이다.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면서 수 만 가지 정치 제도적 실험을 해보았는데 문명이 발달할수록 민주주의 쪽으로 기우는 연유가 무엇이겠는가?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 시행착오를 겪고 배운 인류의 DNA에 진화적으로 각인되어가고 있는 학습효과의 결과일 것이다. 엔진의 성능이 좋아지면 질수록 브레이크의 성능도 높아져야 한다. 위험사회의 도래에 민주적 통제가 절실한 이유이다. 이런 의미에서 KAIST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아마도 가장 낮은 수준의 민주적 통제 필요성에 대한 실험일게다. 4대강 죽이기나 원전사고에 비하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