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동호 (시인·고려대 문과대 교수)
[경인일보=]4월은 잔인했다. 꽃들이 제대로 피어나기도 전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기상이변이 계속되었다. 길고 지루한 겨울을 지내고 쉽게 다가오지 않는 봄을 힘겹게 기다리고 있을 때 꽃과 같은 젊음을 지닌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생들이 네 명이나 잇달아 자살을 했다. 학생들에 뒤이어 교수까지 자살하자 여론은 들끓었고 대학의 최고 책임자였던 총장을 사퇴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나자 슬그머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잠해졌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일까. 뒤늦게 책임론을 펼치려는 것은 아니다. 젊은 학생들의 자살은 한국의 교육 현실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서둘러 덮고 지나갈 일이 아니라 심각한 반성과 대책이 필요한 일이다.

한 통계에 의하면 한국 대학생들의 사분의 일 정도가 자살을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이들 모두 잠재적으로 자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들은 모두 오로지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목표였다. 점수 일 점이라도 올리기 위해 밤늦게까지 과외 공부로 몰리는 아이들, 정규 수업시간에는 모두 졸고 있는 학생들, 그들을 아무도 깨우지 못하는 교사들, 그들에게는 수능 점수가 전부이다. 학부모들이 학생과 교사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것은 점수이다. 학원가의 최고 강사는 국가와 사회에 부정적 언사를 거침없이 쏘아대며 학생들을 극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묻기 어려운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세계 최고의 대학을 만들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희생이었다. 그 정도 사건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게 얼버무리고 지나간다면 그것은 젊은 꽃들의 죽음이 주는 희생의 가치를 정말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들이야말로 한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공부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신의 삶 또한 더없이 귀중하다는 것에 대한 자각과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로지 경쟁의 승리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잔혹한 경쟁의 논리만을 내세운 지식 교육은 그들이 긴 인생을 자신과 싸우며 살아나가는 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쟁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속성교육집단은 미래가 없는 집단이다. 자신에 대한 성찰과 내일에 대한 고민 없이 오직 오늘의 경쟁만이 살 길이라는 근시안적 사고에 사로잡힌다면 오늘을 살 수 있는 이기적 경쟁심은 발휘될지 모르지만 내일의 위기나 예상하지 못한 난관에 부딪쳤을 때 이를 돌파할 내적 에너지가 발생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젊은 학생들에게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과 여유를 갖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교육을 강화시켜야 한다. 수학 문제만 풀고 있는 학생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닭장 속에서 모이를 먹고 자라는 양계장 병아리가 아니다. 다음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모국어교육이다. 교육 개혁의 속도전을 위해서는 한국어도 영어로 가르치라고 한다고 한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렇다면 한국사 교육도 영어로 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뿌리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야말로 젊은 학생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경쟁의 논리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던 솔제니친은 모국에서 추방된 러시아 작가이다. 그에게 가장 괴로운 일은 모국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가 가장 원한 것은 모국으로 돌아가 모국어 속에서 사는 것이었다. 모국어는 그 자신의 영혼이다. 영혼 없는 과학자는 인간을 위해 그리고 모국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오늘의 경쟁에서 이기고 내일의 경쟁에서 뒤지는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 젊은 꽃들의 죽음을 헛되게 해서도 안 된다. 인간의 심성을 함양하는 치유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젊은 학생들의 자살은 앞으로도 계속될지 모른다. 그들을 경쟁의 낙오자로 규정하고 앞으로 달려 나갈 것만 궁리한다면 그 나라와 국가는 진정한 미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