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영렬 (변호사)
[경인일보=]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직업이 있다. 신체 각 부위에 중요치 않은 기관이나 장기가 없듯이 모든 직업은 사회에서 나름의 필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각 직업에는 통념상 약간의 선입견이 있는 것 같다. 필자의 딸이 초등학교 2학년 때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얼굴로 '아빠, 검사는 벌만 주는 나쁜 직업이고, 변호사는 좋은 직업이야?'라고 물었다. 그렇지 않다고 지나가는 말로 대답한 기억이 난다. 이제 공직을 떠나 가끔 과거 처리했던 사건들을 회상해보곤 하는데 만약 딸이(지금은 대학졸업반이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다시 그런 질문을 한다면 '아니, 검사도 벌만 주려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억울한 일도 많이 풀어준단다'라고 대답하면서 필자의 기억에 떠오르는 이 사건을 도란도란 이야기해주고 싶다.

1980년대 초 어느 날 평온하던 서울 강동구 하일동 C씨 마을에 소장이 날아들었다. 원고측은 과거 C씨 마을 일대를 소유하고 있던 서울부자 A씨의 상속인들이었고, 피고측은 1958년 A씨로부터 땅을 구입하여 집을 짓고 살아온 C씨 집성촌 사람들이었다. 원고측은 A씨가 1957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피고측이 1958년에 A씨와 작성했다는 매매계약서는 위조된 것이라고 하면서 마을에서 퇴거하라고 주장하였다. 수십 년간 평온하게 살아온 피고측으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원고측은 A씨의 맏사위를 증언대에 세워 1957년에 사망한 것이 사실이라는 증언을 얻어냈다. 피고측은 경찰에 맏사위를 위증으로 고소하였고 사건은 단순한 민사사건에서 형사사건으로 발전하였다.

피고측은 A씨가 1959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재된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했으나, 실제로 1957년 사망 후 2년이 지나 사망신고를 하였다는 원고측 주장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당시에는 출생신고도 2~3년 뒤늦게 하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원고측 주장을 허위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었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소송의 원칙에 따라 무혐의 의견으로 송치된 위증사건은 필자에게 배당되었다. 기록을 검토한 결과,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사람들 전체가 집단으로 계약서를 위조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에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1차로 조사한 필자는 그들의 얼굴표정에서 너무나 억울해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수사를 하면 할수록 사건은 더욱더 미궁에 빠져들었다. 1950년대에는 별로 비싸지 않은 저렴한 땅이었지만 이제는 땅값이 오를 대로 오른 수십만 평의 땅을 찾으려는 원고측과 수십 년간의 생활터전을 하루 아침에 빼앗기고 거리에 나앉게 될 운명에 처한 피고측은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날이 쌓여가는 사건서류 속에서 이 사건에만 매달릴 수 없는 필자의 입장도 그리 편한 상황은 아니었다. 무슨 뾰족한 단서가 없을까 고민하던 어느 날 평소 답답할 때 찾던 하남시 고향 선산을 방문하였다. 그곳에 세워진 생몰연대가 기재된 비석을 보는 순간 서울부자였던 A씨도 그 묘소 앞에 비석과 같은 기록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곧 맏사위를 소환하여 산소의 위치를 묻자 망우리 공동묘지에 모셨는데 비석을 세웠는지 확실한 기억이 없고 산소의 위치도 정확히 모른다고 했다. 갑자기 머리가 무거워졌다. 설사 망우리에 함께 간다고 한들 원고측에서 계속 그 위치를 모른다고 고집한다면 수많은 산소 중에서 어떻게 A씨의 묘소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고민하던 중 그 당시 망우리 공동묘지를 관리하던 곳이 동대문구청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긴장 속에 그곳에 보관된 1957년부터 1959년까지의 관리부를 추적한 결과, A씨는 1959년도에 매장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마을사람들의 주장이 사실로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제시된 문서 앞에 넋을 잃은 듯 잠시 허공을 쳐다보다가 두 손 모아 용서를 빌던 맏사위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원고측은 관련 민사소송을 모두 취하하면서 마을사람들과 합의하였다.

어떤 사건이나 진실은 있는 것이고 그것을 밝혀내는 것은 수사기관의 몫이다. 그 때 가장 필요한 덕목중 하나가 '성의'를 다하는 자세일 것이다. 너무나 고마워하던 마을사람들의 모습을 추억할 때마다 미약하게나마 검사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게 했던 훈훈한 사건이었다. 오늘도 야근하면서 진실을 찾기 위해 쌓여있는 미제사건과 씨름하고 있을 많은 후배검사들이 생각나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