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각은 개인적으로 30여년 전 군에 있을 때 면회장소였다. 일년에 한 두 차례, 군용 트럭에 실려 임진강 자유의 다리를 건너면 전날 여관에서 밤을 새운 어머니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던 곳이다. 면회소로 쓰이던 함석 건물만 덩그러니 들어선 벌판이었는 데,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민통선에서 이 곳으로 옮겨놓은 철마(鐵馬)는 5분마다 기적소리를 울렸다. 짙은 운무 속에 철조망은 그 모습을 희미하게 감추고 있었다. 질척한 날씨 속에도 분단의 봄을 보려는 외국인들의 발걸음이 잦았다.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 노래비가 눈길을 끌었다. 분단을 노래한 시비(詩碑)가 아니어서 낯설기도 했지만, 친근함이 앞섰다.
비에 젖은 심학산은 연두색의 향연이었다. 화사하지 않은 봄 산이 어디 있으랴만, 오르지 못한 게 내내 아쉬웠다.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 주변은 적막했다. 그림과 시가 어우러진, 카페 분위기의 식당에서 봄날 오후를 풀어 제쳤다. 심학산 자락 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식당을 고즈넉한 기운이 감싸 안았다. 봄날의 오후가 그렇게 깊어갈 즈음, 소박한 봄내음에 취했는지 한 직원이 벽에 쓰인 시를 조용히 낭송했다. 이해인 수녀의 시 '물망초'였다.
이런 날은 시 보다 벚꽃이 피듯 한 곡 흐드러지게 부르는 게 제격이지 싶었다. 시에 버금가는 노랫말이 어디 한 둘인가. 시인들로부터 '으뜸 노랫말'로 뽑힌 '봄날은 간다'가 맞춤이리라. 한참 뒤에 한영애, 조용필이 새롭게 부르기는 했으나, 1953년 발표한 백설희의 처음 버전이 단연 압권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로 시작하는 가사에는 어머니의 새색시 시절이 배어있다. 갓 결혼한 그 품에서 칭얼대던 나의 유년의 기억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어느 한 구절 비켜놓을 대목이 없다. 3절의 '열아홉 시절엔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언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로 시작하는 첫 노랫말은 아련함을 지나 그리움이다. 간드러지게 부를 수만 있다면 가히 절창(絶唱)인 구절이다. 설운도의 노래비가 분단을 토해내고 있듯, 누가 '유행가'라고 가벼이 여길 수 있는가.
지금은 자취를 찾기 힘들지만, 30~40년 전만 해도 고향마을에는 화전(花煎)놀이가 있었다. 4월 초에 한 날을 잡아 젊은 며느리들이 중심이 되어 하루를 질펀하게 놀았다. 날이 정해지면 마을 전체에 묘한 들뜸이 휘감았던 기억이 새롭다. 화사한 치마와 저고리로 치장한 젊은 어머니들은 장만한 음식을 싸들고, 장구·괭과리 같은 풍물까지 챙겨서 마을 앞 섶다리를 건넜다. 이내 산모퉁이를 돌아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그 날은 종일 할머니가 부엌을 지켰다. 해질 무렵, 봄볕에 그을린 것인지, 얼큰한 술기운 때문인지 진달래보다 화사한 어머니의 손에는 항상 참꽃이 한 묶음 들려 있었다. 여흥이 채 가시지 않은 듯, 흥얼대던 콧노래가 바로 이 '봄날은 간다'였다. 그 때는 몰랐지만, 도회지에서 자란 젊은 며느리에게 시골 시집살이가 아마 고달픈 탓이었으리라.
풍물이 달라졌을 뿐, 봄철 야유회의 정취는 예나 지금이나 엇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찰쌀병에 참꽃을 얹은 화전을 기름에 지져 먹는 게 쉽지 않지만, 심학산 꽃 피는 삶에 홀리고 싶은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의 마음이야! 예전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소박한 봄 잔치였다.
4·27 보선 이후 정치권이 요동을 치고, 개각이 이뤄지고, 부산상호저축은행의 파렴치한 행동으로 세상이 시끄러워도 서민들의 삶은 건강하다. 봄날이 가면 가는 줄 알고, 여름을 맞을 채비에 게으른 법이 없다. 서민들의 힘이다. 이런 저런 얘기꽃 속에 2011년 대한민국의 봄은 또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