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승헌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
[경인일보=]소란스럽던 대형 강의실을 평정한 것은 두 단어였다. '거시경제론 정운찬' 그가 양복만 입지 않았다면 복학생이나 조교라고 단정했으리라. 신입생이던 필자는 두 번 놀랐다. 서울대 교수로 부임한 지 5년차로 인기가 치솟던 교수분이 기생오라비 같이 어리고 예쁘장한 꽃미남이었던 것. 그런데 칠판에 쓴 글씨는 영락없이 지렁이가 기어가는 꼴이었으니, 미(美)와 추(醜)의 선명한 대조가 30년이 다 된 지금도 선명하다.

1990년 어느 봄날, 남대문 옆 삼성본관. '그 분'이 나오시는 특별한 월례조회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스피커가 불량이라고 생각했다.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이건희 회장의 목소리가 웅얼웅얼 거리는 게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물어볼 수밖에. 기계는 정상이며, 건강이 좋지 않아서인데 아마 얼마 못갈 거라며,… '역시 신입은 뭘 모르는군'이라던 주위의 귀띔이 생각난다. 그런 그가 고희까지 건재하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의학기술과 돈의 힘에 새삼 감탄하곤 한다.

폭탄주를 마실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1998년 가을, 환경경제학회 뒤풀이 자리.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필자가 폭탄주를 마신 것도, 호기 있게 양주와 맥주를 시켜 능숙하게 폭탄주를 제조하던 곽승준 교수를 접한 것도 그 자리가 처음이었다. 그는 자비를 들여 동강의 생태가치를 연구하고 새만금토론회에서 환경보전의 필요성을 토해내던 환경진영의 기대주였다. 그런 그가 구조적으로 환경보전과는 척을 져야 하는 거대 건설업계 집안이며 현직 대통령과 막역한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4대강 운하를 찬성하고 높은 벼슬자리를 넘나드는 최근에서였다.

정운찬, 이건희, 곽승준. 이 세 명이 비틀리며 엮이고 있다. 각각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으로, 한국 최고의 재벌그룹 회장으로, 대통령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장의 입장에서 초과이익공유제를 사이에 두고 팽팽한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정 위원장이 제안한 초과이익공유제를 따지고 들어가면 분명 정책실행의 맥락에서 다듬어야 할 기술적 어설픔과 구멍이 많아 보인다. 현장감이 떨어지는, 그래서 '교수다운' 모습이다. 국무총리 경력에 의아해진다. 하지만 우리는 초과이익공유제에 담긴 의미에 주목을 하는 것이 지혜로운 대처가 아닐까 싶다. '사회주의적 발상'이니, '경제학 교과서에서 본 적 없다'는 반박은 삼성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려는 '경제학 개론수준'의 발언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세상이 어디 경제학만 가지고, 개론수준의 지식만 가지고 다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하긴 경제학 개론에서는 자기이익만 챙기는 것이 개인이나 사회를 위한 합리적 행위라고 하고 있지만. 곽 위원장이 '공적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를 들고 나온 것은 연기금의 주인인 '국민의 뜻'을 내세우며 공공성을 들고 나오려고 한 듯하다. 아울러 '경제학 교과서'를 내세우는 이 회장을 '경영학적 논리'라는 앙칼진 대응으로 기를 죽이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하지만 이 회장이 '주주권 행사는 환영'이라 맞서고 정 위원장도 이익공유제를 밀어붙이려는 결기를 보이고 있는데다, 줏대 있는 한나라당 신임원내대표도 이 판에 가세하는 형국이니 싸움은 워밍업이 막 끝났을 뿐인 듯하다.

세 사람의 겨루기는 결국 국민을 대상으로 편가름을 하려는 듯하다. 정, 곽 두 위원장은 평범한 국민들을 상대로 진정성을 호소하고, 삼성은 예의 그렇듯 여론주도층을 관리하고 로비하려 할 것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어떤 심경일까.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오래가려면 함께 가라'고 했다. 아프리카 속담이다. 먼 길을 가야하는 철새들이 V자를 이루고 날면 단독으로 날 때보다 훨씬 힘이 덜 든다고 한다. 앞에서 나는 새로부터 양력(위로 뜨는 힘)을 지원받아 에너지를 적게 소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규모 10위권, 일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인 대한민국과 국민들, 그리고 세 사람까지 모두 진정 본으로 삼아야 할 것은 아프리카와 새의 지혜가 아닐까. 싸울 것인가, 협력할 것인가. 공정하고 행복한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위한 선택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