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승현 (가천의과학대 사무처장 겸 교양학부 교수)
[경인일보=]'아프니까 청춘이다'. 김난도 교수가 쓴 대학생들의 일상과 고민을 담은 책이다. 김 교수의 진성성과 온기어린 시선이 아이들에게 친절한 안내자로 바싹 다가서고 있는 것 같다.

스펙 쌓기와 경쟁에 찌들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도 서슴거리지 않는 이 시대에 위안이 되기 때문이리라. '성공을 서두르지마라' '글은 힘이 세다' '신문을 읽어라'…. 강단에 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토해냈을 법한 내용들로 그득하다.

그리 보면 우리는 해답을 알고 있다. 대학시절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를 경험칙 상으로 꿰뚫고 있다. 방학이면 만사를 제치고 여행을 떠나는 결기가 먼 훗날 삶을 융숭하게 만드는 자산이라는 것을 잘 안다. 인문학적인 사고력과 통찰력이 인생의 긴 승부에서 유리하다는 진실도 체험을 통해 느끼고 있다. 마찬가지로 '소년 급제'가 누대(累代)에 걸쳐 내려온, 경계해야 할 일이라는 것쯤은 숙지하고 있다. 김 교수가 오늘에 맞게 정리했을 뿐이다.

영어와 상식, 여기에다 논문을 더하면 전공과 학점에 상관없이 어느 직장이나 공채에 응시할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 1등부터 점수 순으로 합격자를 끊고, 면접을 거쳐 정식 직원이 되었던 게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필기시험 성적순이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인식됐다. 그때 '스펙 쌓기 시대'가 올 것인지 누가 예측이나 했었는가.

그 스펙 광풍이 대학가를 휩쓸고 있는지 벌써 오래다. 어학 연수를 위한 휴학이나 학점 관리를 위해 목을 매는 것은 더이상 얘깃거리가 아니다. 성적을 산정할 때가 되면 교수나 학생이나 똑같이 긴장 상태가 된다. 출석 점수라도 하나 잘못 계산하면 곧바로 항의가 들어오고, 순위가 뒤바뀌면 난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새 이 스펙의 위력도 예전같지 않다고 한다. 인턴 시절에 쌓은 경험과 성과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말 신입사원을 채용한 대기업 임원의 전언이니, 변하는 흐름을 엿볼 수 있겠다. 급변하는 국제경제의 규모나 기업환경을 언제까지 스펙으로 감당하긴 어려울 것이다. 필기시험이 종언을 고하듯 스펙도 역사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지금은 선진국 제품을 그대로 베끼고 흉내내어 수출하던 시대가 아니다. 싼 값의 모방제품 수출시장이 중국에 점령당한 것은 과거지사다.

우리도 전자, 자동차, 가전, 철강 분야에서는 세계 일류기업들과 나란히 경쟁대열에 서있다. 눈 밑에서 창의의 환경이 개화하고 있는 중이다. 명품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일수록 선진국이다. 남보다 앞서지 않으면 그건 유사제품이기 때문이다. 갈수록 창의적인 인재의 몸값은 올라가게 되어 있다.

여기에 역량, 즉 위기를 관리하는 힘도 갖추어야 한다. 앞서가려다 보면 무수한 암초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세계 최고의 전자 제품을 생산하던 일본 기업들의 현주소가 어떤가. 20년간 세계 휴대폰 시장을 지배했던 핀란드 노키아의 신화는 또 어떤 상황인가. 속절없이 무너져내리고 있다. 문제와 위기를 해결할 역량이 부족하면 국가든, 기업이든 좌초되는 건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우리도 창의와 역량, 협력과 협동의 인재가 절실한 시대로 성큼성큼 진입하고 있다. 가히 스펙의 전성시대에, 이를 대체할 새로운 배아(胚芽)가 발아하고 있는 것이다.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인류사가 보여주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틀에 맞추려면 우리의 청춘들은 또 아파야 한다. 그런데 대학은 협동의 시대를 앞두고 일렬로 세우는 상대평가를 고수하고 있다. 면접과 자기소개서 작성법을 가르치는 취업 특강은 줄을 이어도 문화적 감성에 눈 뜨게 하는 예술 특강은 태부족이다.

창의성은 생각의 기초 체력을 튼튼히 하는데서 나온다.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에 둔 인문학적 소양과 예술적 감성이 그 힘의 원천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대학 등급을 매기는 평가 지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성의 관행이 아픈 청춘을 더 아프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절박하게 되돌아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