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희송 (독서시대 대표)
[경인일보=]80년대는 민주화운동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었다. 학과회의에서는 종종 수업거부에 관한 찬반투표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에게 이 결의는 민주화투쟁보다 학교에 등교하기 싫은 욕구를 채워주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며 그래야 민주화 이후의 국가발전을 담보할 수 있다는 논리는 정작 민주화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학생들보다 이를 노는 기회로 삼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더 심한 반발을 샀다.

대학을 졸업하고 오래 사회생활을 한 후에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과제물을 내기 위해 원고지에 볼펜을 끄적거리던 시대는 흔적조차 없었다. 강의마저 컴퓨터자료가 바로 영사되는 스크린 앞에서 진행되기 일쑤였다. 그리고 공부를 안 하는 것은 범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쉽게 학문적 자료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학생들은 수업을 하는 것보다는 안 하는 것을 좋아하고, 정해진 시간을 채우는 것보다는 대충 마무리 하는 것을 선호했다. 비싼 등록금에 대한 불만 역시 변하지 않고 있었다. 이 또한 80년대와 마찬가지로 대학 졸업이라는 형식적 스펙을 쌓고자 하는 비정상적 욕구를 실현하는데 장애가 되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대학은 본질적으로 학문적 욕구를 해결하는 장소이다. 학문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실력으로만 입증될 수 있다. 그런데 '학문적 욕구를 해결한다'는 '대학을 다녔다'라는 형식적 행위로, '실력'은 '학위증'이라는 종잇조각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대세가 된 듯하였다.

이 세상의 모든 삼차원적 공간은 시간의 흐름이란 또 하나의 축에 의해 역동성을 갖게 된다. 시간의 흐름이 혼재된 공간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시공간(time-space)'이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물질공간인 3차원 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란 축에 의해 존재의 가치를 가진다.

이렇듯 모든 일은 비물질적 본질과 물질적 현실의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 때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그 일에 대한 본질을 이루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인간자체가 형이상학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더라도 그것 자체로서는 인간의 존재가치를 높이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질이 없이 '맛있는 음식'이나 '좋은 옷'이라는 물질적 형식에 인생의 의미를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학창시절, 교수님들의 강의를 듣고 싶은 나의 바람은 겉으로는 조국의 민주화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는 이유에 의해, 그러나 많은 부분, 실제로는 대학졸업장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헛되이 써 버리려는 학생들의 노력에 의해 좌절당했었다. 졸업장과 학위증 그리고 대학교를 다녔다는 물리적인 사실은 학문을 통한 내면적 실력의 확장이란 본질적 측면을 대체하지 못한다. 이 모든 형식적인 것들은 정신적 깨달음의 정도를 위해 협력하는 물리적 조건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이 물리적 조건이 위대한 학문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면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당연히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학문의 추구라는 본질을 잃은 세대에서 그를 이루기 위한 수단인 '싼 등록금'을 위해 투쟁을 벌인다는 것은 앞으로 형식과 본질이 따로 떨어진 시대를 예고하는 일에 불과하다.

공부하지 않은 80년대의 학생들이 내면적 실력 대신 '투쟁'의 전력을 내세워 사회지도자의 위치에 올라섬으로써 생긴 사회적 부조리와, 이 시기를 이용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누리면서 시간의 흐름에 의해 그저 어른이 된 실력 없는 고학력자들이 만들어 내는 국가적 어지러움을 우리는 지금 톡톡히 경험하고 있다. 대학등록금 반값 투쟁을 함에 있어 그 투쟁이 학생들로 하여금 학문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투쟁의 기치 아래에서라도 늘 책을 보아야만 그 투쟁이 학문의 본질적 의미와 상통할 가능성이 있음을 되새겨야 한다. 벌써 주말이다. 반값등록금 투쟁을 포함한 우리 주변의 일들이 진정한 의미를 갖게 하기 위해서 책 한 권을 손에 잡아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