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구 (중앙대 미술학부 교수·화가)
[경인일보=]요즘 일간지나 저널의 미술기사 대부분은 미술시장과 그림 값 얘기가 주종을 이룬다. 해외 경매소식과 국내 아트페어 소식이 단골 메뉴다. 짧은 전시회 소식이나 베니스비엔날레 개막과 같은 뉴스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림 값과 미술시장 얘기는 다른 소식을 압도한다. 물론 근래에 미술시장이 커졌고 독자들에게도 관심 있는 정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 미술문화의 트렌드 중 하나는 아트페어이다. 아트페어란 미술작품을 판매하는 미술시장 전시회를 말한다. 근래 서울에서 많은 아트페어가 수시로 열리고 있으며 지방도시에서도 자주 열린다. 원래 아트페어는 유명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판매하는 곳이지만 근년들어 새로 발굴한 젊은 작가나 신진작가들이 대거 참여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아트페어는 작품 판매가 주목적이다 보니 여느 성격의 전시회보다 대중성에 눈높이를 맞춘 작품들이 주류를 이룬다. 소위 '예쁜그림'들이다. 장식성과 나르시즘적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그리기도 하고, 이런저런 기법과 재료를 사용하여 해외 명작을 재현하기도 한다. 유명작가의 작품을 비슷하게 그린 것도 흔히 본다. 그러다 보니 70년대 유행했던 극사실회화가 요즘 난데없이 유행하고, 마릴린 먼로와 같은 우리의 삶과 아무 연관 없는 60년대 미국의 여배우 얼굴을 열심히 그리는 작가들도 넘쳐난다. 화려한 색채의 꽃과 탐스런 과일, 소나무와 조선 백자 등의 소재는 요즘 아트페어에서 빠지지 않는 인기 품목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들 작품에서 국적이나 시대정신, 창조적인 작가정신을 찾아보기가 어렵고 미술사적 평가 또한 요원한 시장용 작품들로 여겨질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비평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평이 실종됨으로써 건강한 미술문화는 위협받고, 대중에게 영합하는 상업주의가 넘쳐난다. 창작과 비평보다 창작과 시장의 논리가 앞서고, 그런 과정에서 괴물처럼 왜곡된 미술시장과 상업주의에 물든 작품들을 잉태하는 것이다. 비평으로 하여금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이 분별되고 평가될 때 좋은 작가와 함께 건강한 미술시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날 비평의 자리가 사라진 곳에 화상과 미술시장이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본다. 사실 비평이 실종한 원인도 비평가가 없거나 무능해서가 아니라, 시장과 자본의 논리 앞에 설자리를 잃어버린 시대적 현상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화의 큰 책임은 우선 작가들에게 있다. 건강하고 훌륭한 작품이라면 행여 당대에 미술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어느 시기에 반드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돼 있음은 불변의 진리이다. 빈센트 반 고흐나 박수근은 생전 제대로 그림을 팔아보지 못하고 가난 속에서 예술혼을 불사르다가 생을 마감했으나 오늘날 천문학적 가격에 거래되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더욱이 오늘날 시장성을 좇는 젊은 작가들이나 이를 부추기는 일부 화상의 행태는 다소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대학의 졸업전시회는 물론이고 학교의 실기실까지 은밀하게 출입하면서 어린 작가들을 부추기고 유혹하는 것이 미술계의 현실이다. 이로부터 아직 성장하지 못한 젊은 작가들을 보호하기란 쉽지 않다. 대학에서 미학과 비평, 미술사를 바탕으로 실험정신과 작가정신을 가르치지만 자본의 유혹 앞에서 그것은 곧 무력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일찍이 현대미술의 거장 요셉 보이스는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을 독일의 작은 도시 카셀 시내에 7천그루의 떡갈나무를 심는 프로젝트로 남겼다. 사회조형이라고도 불리는 이 프로젝트는 예술이 오브제로서 미술관에서 소장되고 물신화하는 물건이 아니라 세상과 사람들의 삶속에 스며들어 하나의 자연으로, 녹색의 숲이 되는 현상과 과정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한편 아트페어가 넘치는 시대에도 시장논리에 빠지지 않고 건강한 작가정신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공공미술이나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실행하면서 열심히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는 사실은 우리 미술의 건강성과 희망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