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일 오후 인천 중구 월미공원내 해군첩보부대 충혼탑 앞. 변변한 묘지 하나 없이 나라를 위해 죽어간 선배들이 저 세상에서라도 편하게 쉬길 바란다는 해군첩보부대충혼탑건립위원회 임형신(42) 사무국장이 지난 10일 제막된 충혼탑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경인일보=홍현기기자]"어둠에서 밝은 세상으로 나오는데 61년이 걸렸습니다."

지난 10일 해군첩보부대충혼탑 제막식이 열린 인천 중구 월미공원. 우뚝 솟은 충혼탑 앞에서 함명수(87) 전 해군참모총장이 눈물을 터뜨렸다. 61년전 한국전쟁 당시 숨진 부하 2명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조국을 위해 우리가 나서야겠다. 가자."

1950년 8월 18일 부산자갈치 시장에서 당시 해군첩보부대장인 함명수 전 총장의 한 마디에 16명의 부대원이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랐다.

작전명 '크로마이트(인천상륙작전)'에 앞서 북한군의 동태를 파악하는게 이들의 임무였다. 그와 부대원은 어선을 개조한 첩보선에 몸을 싣고 부산을 떠난 지 6일만인 8월 24일 인천 영흥도에 도착했다.

부대원을 3개 팀으로 나눈 뒤 북한군과 공사장 인부 등으로 위장한 뒤 인천, 수원, 서울 등지에 잠입해 정보수집 활동을 펼쳤다.

인천상륙작전 하루전인 9월14일 인천, 수원, 서울의 병력규모를 파악한 뒤 영흥도에 모인 부대원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철수는 쉽지 않았다. 뒤늦게 이들의 행적을 감지한 북한군 대대급 병력이 공격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부대원의 안전한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이등병이 남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하던 이들은 사로잡힐 경우 정보가 누출될 것을 우려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충혼탑 앞에 서자 61년전 사선을 넘나들었던 부대원들의 활약상이 생생히 떠오르면서 함명수 전 총장의 눈에서 저절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린 것이다. 충혼탑이 위로하는 사망자는 비단 이들만이 아니다. 전쟁은 중단됐지만 그간 북을 오가면서 죽어간 수많은 첩보부대원들도 충혼탑을 통해 위로받고 있다. 현재까지 정부가 파악한 해군첩보부대 사망자는 7천726명. 비록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지만, 대신 명단이나마 충혼탑 밑에 묻혀 있다.

해군첩보부대충혼탑 건립위원회 임형신(42) 사무국장은 "1948년 창설 이후 정보누설의 우려 등으로 항상 어둠 속에만 있었던 첩보부대원의 모습이 드디어 세상 밖에 나왔다"며 "변변한 묘지 하나 없이 나라를 위해 죽어간 선배들이 저 세상에서라도 편하게 쉬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