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의 시 '연꽃…'에 발길이 잡힌 것은 얼마 전, 남양주 예봉산과 운길산 하산 길에 들른 양평 세미원(洗美苑) 때문이었던 것 같다. 두물머리(양수리) 강가 정원은 연꽃의 화해(花海)였다. 아직 만개하기엔 이른 철이었지만, 빗속에 핀 연꽃은 멀리 물안개 자욱한 북한강과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미당의 말년은 일제 말엽의 친일 행적으로 고달팠다. 작고할 때까지 30년을 살았던 서울 관악구의 봉산산방(蓬蒜山房)이 헐릴 위기에 놓인 적도 있었다. 지자체의 도움으로 원형을 유지했지만 미당의 삶 자체가 화해와 통합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그날 선배 부부와 저녁 자리에서는 지난달 초 돌아가신 김준엽 선생과의 인연이 화제에 올랐었다. 중국 대학들을 함께 둘러본 기억이었다. '중국 지도층 인사들이 얼마나 열렬히 환영하고 극진히 모시던지, 항일 투쟁에 대한 존경심같은 것이 느껴졌다'고 했다. 일본군 학병으로 끌려가 중경 임시정부로 탈출한 6천리 길의 신산했던 김준엽 선생의 여정은 자전적 독립운동사인 '장정(長征)'에 오롯이 남아있다. 항일과 민주화, 권력에 대한 선생의 초연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뚝 서기에 족하다. 비교의 영역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여전히 산행과 저녁식사의 평범한 일상에서조차 항일·친일의 역사와 부딪치며 살고 있다. 광복이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시점에. 언제쯤 진솔한 반성과 사회적 재평가 작업이 마무리되어 '대화해의 시대'는 올 것인가.
하기야 최근 KBS 수신료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백선엽 장군의 친일 전력이 도마에 올랐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겠다. 만주군 장교로 3년간 복무한 젊은 날의 전력이 빌미였다. '친일 전력에 대한 평가없이 어떻게 전쟁 영웅으로 미화할 수 있느냐?'는 게 요지였다. 하지만 그 불행했던 시대에, 식민지 젊은이가 선택할 수 있는 미래는 얼마나 되었을까. 시대적 불화가, 뒷날 전쟁의 참화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공로마저 퇴색하게 만들 만큼 공존할 수 없는 멍에인가. 여야의 논쟁을 보면서 내내 그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지난 세월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으로 많은 것을 지우고 애써 잊어왔다. 친일잡지에 '이토(異土)'라는 한 편의 시를 쓴 월북 시인 정지용을 50여년이 지난 뒤 '향수'라는 노래로 겨우 만났던 터다. 중학시절 '사랑' '무정' '단종애사'를 밤새 읽으며 마음 졸였던 기억이 생생한데, 그 춘원이 보이지 않은지 오래다. 육당의 '삼국유사 해제'와 '한국불교사론'은 또 어떠한가. 모두 친일의 겉옷에 싸여 지하에 묻혀 있다. 강산이 세 번 넘게 바뀔 만큼 긴 시간이었으니, 나약하고 고달팠던 지식인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은 아니었을까.
우리 사회의 친일 단죄에는 오늘의 일본 태도도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다고 봐야한다. 전후 일본이 보인 어정쩡한 사과와 반성이 친일 행적을 더욱 옥죄게 만든다. 여기에 광복 이후 분단의 아픔까지 내재되어 있으니 훨씬 엄혹한 측면이 있다.
새삼 2차대전 이후 프랑스의 나치부역 청산 과정을 들먹일 생각은 없다.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고자 했던 알베르 카뮈와 관용과 이해를 호소했던 프랑스와 모리아크 사이의 논쟁을 통해, 단죄의 단호함이 용서와 화해의 따뜻함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인류사의 역설을 상기하고자 할 뿐이다. 우리 민족을 누천년 버티게 한 '한(恨)풀이'도 용서의 과정이지, 단죄의 결과가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단 하루의 생활조차 비디오로 찍어 놓으면 혼자서도 보기 부끄러운 것이 인간들의 삶이라고 한다. 더구나 이름까지 바꾸게 한 모진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생애이다. 전 인격과 업적으로 바라볼 때는 언제쯤일까. 미당이 노래한 '연꽃 만나고 가는' 연향(蓮香) 바람은 과연 우리 곁에 오긴, 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