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명구 (아주대 교수)
어머님의 열여덟 번째 기일을 맞아 장맛비를 뚫고 올해도 예외 없이 집안 식구들이 모였다. 젊은 시절 시험도 자주 낙방하고 자존심 강하고 거기에 고집도 세어서 '엄마'와 자주 부딪혔던 나는 결코 사랑스럽고 훌륭한 효자 아들이 아니었다. 그나마 데모하다 감옥가지 않은 것, 외국서 학위하고 와서 제 밥벌이 하는 직장을 가진 것은 그리도 원하시던 교회 나가기와 담배 끊기 거부에 대한 최소한의 벌충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죄스러운 마음에 어머님의 기일은 제사 중에서도 가장 큰 제사이고 항상 마음이 쓰이는 제사이다.

홍동백서(紅東白西) 격식 맞추어 상을 차리고 '유세차'(維歲次)로 시작하여 '상향'(尙饗)으로 끝을 맺던 유년시절의 낭랑한 축문소리는 오래전 어머님이 교회에 나가시고 한참 후 아버님까지 가세하시면서 구약성서 시편 몇 절과 찬송가 몇 장 그리고 주기도문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유의 제사 진행은 10대 종손이면서 동시에 한국의 주류 개신교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 견해를 지닌 나름 굳건한 '비'(非) 기독교인인 내게 고백컨대 오랜 기간 동안 커다란 곤혹이었다. 돈과 사랑, 양자택일로 고민하던 심순애처럼 나는 자존감과 (자식 된)도리간의 갈등으로 큰 마음의 고생을 하였다. 그래도 오랜 세월 이리저리 부딪히다보니 부자지간에 기대치의 조율이 이루어져 알고도 모른 체 모르고도 아는 체 염화시중의 미소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아무런 탈 없이 제사를 모셔왔던 것이다. 내가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 구절을 '봉독'하는 형식에 대한 양보를 하자 아버님은 더 이상 교회를 강요하지 않으시는 내용상의 자유를 아들에게 허하시는 암중모색의 현실적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이른바 '건설적 모호성'은 난제(難題) 해결을 위한 오래된 협상기술의 요체다. 그런데 바로 오늘 제사 후에 아버님의 한 마디는 굳건하다고 믿었던 부자지간의 건설적 모호성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애비야, 내가 이제 나이도 들고 눈도 어두우니 네가 종중 일과 제사를 맡아서 주관하여라." 아버님을 모시고 일 년에 열 번 이상의 제사를 모시자면 비기독교도인 나는 찬송가와 성경책을 강의준비하듯 섭렵해야 하는 것이다. 아! 그 암담함이란!

내가 직접 기독교식으로 제사를 주관하는 것과 수동적으로 이런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체성의 측면에 있어 그야말로 천지차이지만 오십대 후반의 아들은 차마 '유세차' 방식으로의 회귀를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차례 뒤 저녁상을 물린 후 일가권속들을 배웅하고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아내와 마주 앉았다. "아무래도 아는 목사님 만나 일 년 치 주일예배 목록을 좀 받아야할 것 같소. 이 중에서 열 댓 개만 추려 데이터 파일을 만들어 놓으면 제사별 맞춤 예배 주관이 가능할 것이오. 종교적 신념에 관한 민감한 부분은 아버님께 부탁드리고 나는 나머지만 몸으로 때우겠소. 직업이 떠드는 것이니 그리 힘들지는 않을 것이오." 아내가 답한다. "열 댓 번 제사상 차리는 것보다는 낫지요."

내가 이리 하여도 아버님은 아실 것이다. 애비가 신자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이래서 우리 부자는 제사 물려받기를 통해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건설적 모호성과 부자유친(父子有親) 관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부모님이 섬기는 신을 내가 왜 섬겨야 하는지 한국 내 대다수 교회들의 행태를 보면 도무지 스스로를 설득시키기 어렵지만 그래도 어머님이 생전에 그리도 좋아하시던 찬송가 404장 3절 첫 구절은 아직도 나를 눈물짓게 한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삼아도 한없는 누구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어머님! 불초소자 삼가 재배 드립니다.

추신: 쓰다 보니 개인사로 국한 되었지만 이 글을 쓰기 전에 나는 한국의 진보와 보수 혹은 각 진영 내의 분파간 갈등해결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성숙한 관용이 잔잔하게 스며드는 민주적 공동체를 기원하며 마지막 기고를 맺는다. 꾸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