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동원 (객원논설위원·인하대 교수)
창업은 지역경제의 꽃이다. 특히 양질(良質)의 창업이 많을수록 지역경제가 얻는 효과는 더욱 커진다. 기술 역량이 높은 우량 벤처기업의 창업은 고용효과 뿐만 아니라, 지역산업구조를 개편하여 혁신지역으로 변모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본래 벤처기업은 기술로 승부하는 만큼 고용효과가 크지는 않을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최근 중소기업청의 발표에 의하면, 벤처기업의 5년 평균 고용증가율은 12.65%로 대기업(2.26%)과 일반중소기업(4.99%)의 평균고용증가율보다 최소 2.5배에서 최대 5배에 달할 정도라고 한다. 우량 벤처창업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우는 중요한 통계로 생각된다.

한국경제는 모든 행정단위별로 창업 활성화에 주력했지만, 아직 정확한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감춰진 해법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창업 활성화의 숨겨진 비결은 '창업계보(系譜)'이다.

창업계보란 지역기업에 고용되었던 사람들에 의해 그 지역에서 창업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 창업계보를 통해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미국의 실리콘밸리다.

1938년 휴렛패커드(HP) 창업에서 시작된 실리콘밸리가 정작 세인의 관심을 끈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57년 '페어차일드 반도체' 설립에서 부터다. 이 기업은 '쇼클리 반도체'에서 근무하던 8인이 창업한 회사였는데, 이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실리콘밸리가 반도체 창업의 계보를 이루는 모태가 된다. 페어차일드 설립 6년 후 고든 무어(Moore)와 로버트 노이스(Noyce)에 의해 '인텔(Intel)' 기업이 탄생하는 등, 페어차일드는 36개의 창업기업을 낳은 것으로 알려진다. 심지어 대표적 벤처캐피털 기업인 '클라이너 & 퍼킨스'도 그 계보에 속한다. 실리콘밸리에서 '클라이너 & 퍼킨스'가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면 벤처캐피털 업종의 모태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성공적인 창업계보 구축 과정이 주는 시사점은 적지 않다.

첫째, 연고(緣故)가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다. 창업계보를 이루려면 연고주의를 건전하게 잘 살리는 것에 해답이 있다. 연고주의를 무조건 전근대적 방식으로 취급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지역경제를 살리는 합리적 해법으로 보아야 한다. 창업 초기에는 인력, 자본 및 판로 측면에서 많은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창업자가 익숙한 곳 그리고 인맥이 살아있는 지역에서 기업을 시작하는 것이 아무래도 유리하다. 특히 연고의 불합리성을 극복하려면, 학연과 지연을 넘어서는 직장연(職場緣)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실리콘밸리에서 나타나듯이, 근무지에서 형성된 연고가 주도적으로 창업계보를 형성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직장연으로 창업계보가 만들어지는 것은 전통적 연고주의와는 구별되는 합리적 연고주의를 한국경제에 주입하는 의미도 갖는다.

둘째, 창업계보는 철저히 기술 분화를 따라 이뤄져야 한다. 실리콘밸리 사례에서 볼 때 완전히 동일한 기업을 증식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기술적 분화를 따라 부화된, 즉 연관성은 있지만 새로운 기술 돌파구를 열어주는 창업이 살아나야 한다. 예를 들어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기술적으로 통합 서킷(integrated circuit)이라는 틈새를 공략했는데, 이는 모태기업인 '쇼클리 반도체'가 트랜지스터 분야에 주력한 것과 차별화된다. 또한 페어차일드의 아들(子)격인 '인텔'은 차세대 기술 분화를 포착하고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볼 때, 창업계보는 동종 업체들 사이의 단순 경쟁을 늘이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분화를 따라 새로운 성장 경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젊은 청년들에게 창업가의 꿈을 권면하지만, 기업가의 삶이 얼마나 힘든가를 생각하면 큰 소리로 강조하기도 어렵다. 그들이 외로운 빈 들판에서 시작하기보다는 연고지역에서 성숙한 사업 모델을 도출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귀중한 창업 지원조건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