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고려대 문과대 교수 최 동 호
나혜석의 생가 터가 있는 수원 행궁동 동사무소 강당에서 지난 22일 오후 제1회 나혜석 학술상 시상식이 열렸다.

그는 1896년 4월 수원에서 태어나 1913년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한 조선 최초의 여성 화가였으며 1917년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한 최초의 여성 작가이기도 했다.

1919년 3월 조선독립운동 당시에는 여기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그는 생의 전반부에는 조선 최고의 명망가였다. 그러나 1930년 남편과 이혼한 이후 그의 삶은 비극적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비참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

특히 그가 1934년 발표한 '이혼 고백장'은 당시 조선사회를 뒤흔들 정도의 반향을 불러일으킨 일대 사건이었으며 정조를 유린한 대가를 요구한 '위자료 청구사건'은 사회적 관습에 굴하지 않는 그의 불꽃 같은 삶의 의지를 보여주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나혜석의 찬란한 예술적 성취는 그가 불러일으킨 파란과 비참한 몰락으로 인해 망각의 저 편으로 사라져갈 위기에 처해 있었다.

망각의 어둠 속에서 나혜석의 삶과 예술을 최초로 부활시킨 것이 이번 학술상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이구열 선생의 평전 '에미는 선각였느니라'였다. 1974년 간행된 이 책은 나혜석에 대한 본격적인 평전으로서 이후 나혜석 연구의 길잡이가 되었다.

이후 나혜석은 불사조처럼 다시 태어나 그가 생전에 염원했던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다. 나혜석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 혼재하던 시기에 이번 최우수 학술상 수상자인 서정자 교수는 작가로서 나혜석의 작품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선구적 업적을 축적했다.

서 교수는 1988년 처음 나혜석의 단편 소설 '경희'를 발굴한 것은 물론 그의 문학사적 의미를 부각시켰으며 2000년 나혜석의 예술적 업적을 총망라한 '정월 나혜석전집'을 발간하여 최초의 여성 작가로서 나혜석 연구의 초석을 다졌다.

나혜석의 본격적인 부활은 기념사업회를 이끈 유동준 회장의 열성적인 노력에 힘입고 있지만 수원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도움이 없었더라면 결코 지금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수원시가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다.

수원시의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예술인을 찾는다면 그 분은 나혜석일 것이다. 나혜석기념사업은 수원시 문화예술의 창조적 역량을 강화시키는 일 중의 하나이다. 수원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화성행궁이 복원되었다고 하더라도 더 큰 미래를 위한 창조도시로서 수원이 거듭나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에 대한 창조성이 강화되어야 한다.

선조들의 유산을 가꾸고 살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미래의 세대들이 이를 더욱 발전적으로 끌어나갈 때 수원시의 미래가 더 크게 열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수원시의 미래는 첨단산업과 문화유산의 창의적 공존이며 이를 위해서는 문화예술의 적극적인 계발과 활용이 필수적이다. 나혜석의 업적을 기리고 알리는 일은 이러한 일들의 작은 출발에 불과하다.

문화예술도시로서의 수원시의 격상은 나혜석의 부활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이번에 처음 거행된 나혜석 학술상은 여러 의미에서 수원의 문화적 저력을 신장시키는 뜻 깊은 일 중의 하나이다. 어떤 예술도 학문적 심화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생명력을 깊게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해 둘 것은 이러한 사업들은 나혜석 개인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미래의 수원을 위한 것이다. 인구 100만명을 넘어서는 도시가 과거의 유물에 의존하거나 거기에 담을 창조적 콘텐츠가 없이 비대해진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앞으로 도시의 품격은 그 도시가 얼마나 새로운 문화예술의 창조적 역량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나혜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미래의 수원을 이끌어나갈 창조적 젊은 문화예술인의 탄생을 소망하는 헌사이다. 그것은 바로 미래로 뻗어나갈 수원시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