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초 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 선정
선 무한반복·유기적 변형 작풍 고수
인천 근대문물 소재 작품 포부 밝혀


이승현의 미확인 생명체가 갖는 특이한 존재적 층위는 그것이 생성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무엇을 어떻게 그리겠다는 계획이나 의식도 없이 온전히 '그리기'라는 행위에만 몰두해 주어진 공간 안에서 작가의 손끝을 따라 확장되는 자율적인 생성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작가이지만, 그것은 작가가 화면에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고 통제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창조와는 분명 다르다. 흡사 어디엔가 원래 존재하고 있던 무언가가 작가의 손끝을 타고 내려와 화면에 안착하는 것처럼 작가는 그 일련의 흐름에 자신을 내어준다.

이승현의 그림 속 형상은 재현도 아니지만 순수한 창조도 아닌 형식적 자율성에 의존하여 생성된 고유한 위치를 점한다. - 신혜영 미술평론가의 'Crypto MUSEUM-자율적 그리기에 점령당한 명화' 중에서(2010년)

▲ 이승현 作 'Masterpiece virus 009'.

1년 전 이맘때 서울 서교동의 한 갤러리에 '명화 바이러스(Masterpiece Virus)'가 출몰했다. '미확인미술관(Crypto MUSEUM)'이라는 이름 아래 현존하는 명화 바이러스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 처음이어서 국내 미술계의 관심을 끌었다.

서양미술사의 대표적 명화들에 침투한 이승현씨의 '미확인 생명체'는 그림마다 각기 다른 양상으로 확산되고 정착해 기이한 모습으로 명화의 기존 질서를 뒤흔들었다.

고흐의 '자화상'과 베르미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의 얼굴은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해 여기저기 촉수가 자란 형상이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처럼 배경과 형상까지 생명체가 파고들어 그 형체를 알 수 없게 된 경우도 있다.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의 작품 등도 마찬가지다.

올해 초 인천아트플랫폼 입주작가로 선정돼 후속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이씨를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씨는 현재까지 창작한 포트폴리오를 직접 보여주며 작품 세계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에서 '명화 바이러스' 연작들을 그렸다"고 말했다. '선의 무한 반복과 자율 증식'을 통한 창작을 고수하고 있는 이씨의 작품은 작가로서의 출발지점과 맞닿아 있다.

그는 "회화의 모든 원칙과 관습이 자신을 옭아맨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 같은 원칙과 관습을 제거하고 남는 것들을 고민했고, 결국 '그리기'라는 최소한의 요소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빈 캔버스에 어떤 계획도 없이 최초의 선을 긋고 그 흔적에 따라 다음 선을 이어감으로써 유기적 형태를 완성하는 것이다. 선이 반복되고 중첩되면서 농담과 명암이 나타나고 우연적인 형상이 탄생하게 되며, 그 형상이 일종의 생명체로 인식되는 이유도 그리기 형식의 특징에서 비롯됐다.

이씨는 2006년 철거가 예정된 조립식 가건물(대학원 강의실 겸 작업실)에서 기존에 사용되던 기물들과 흔적 등을 그대로 이용해 2개월간 작업했다. 작업 후 건물이 철거되기 직전 이를 해체해 전시장으로 옮겨와 재조립해 전시회도 가졌다.

이씨는 "근대 문물 등 각별한 의미를 띤 공간이 인천에 많다"며 "5년 전 했던 작업을 인천에서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이 같은 작업 공간을 찾고 있는데 쉽지 않다"며 "이번 인터뷰를 통해 내 뜻이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작가소개


이승현(37)은 서울과학기술대학교(대학원)에서 조형예술학을 전공했다. 2004년 유형생식, 2007년 미확인동물학, 2010년 Crypto MUSEUM 등의 개인전을 가졌다. 작가는 특정 종(種)이나 군(郡)의 생명체를 묘사하지 않았음에도 작품에 흡사 생물이 번식하는 것과 같은 생명성을 부여했으며, 이 생명체는 'N.C(New Creature)' '몬스터(Monster)' '미확인동물학(Cryptozoology)' '가변증식체(adjustable proliferator)' 등의 이름으로 변형·발전했다. 또한 작가는 건물이 철거되기 전 작업한 벽면과 그 밖의 부수적인 요소들을 그대로 뜯어내 보관하였다가 이후 몇 차례 미술관 전시에서 재배치해 보여준 바 있다. /김영준기자

사진/김범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