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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선 웅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 |
그릇을 먼저 찾자. 무엇을 담을 것인가는 그 다음 문제다.
연극을 하다보면 흔히 내용과 형식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로 논쟁을 벌이곤 한다. 누구는 내용이 중요하다고, 누구는 형식이 무시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다. 그런데 우선을 정해보라고 하면 대개는 내용이 먼저란다. 과연 그럴까.
'내용이 먼저가 되면 혼란에 빠진다'가 내 생각이다. 반대 사례로 사과가 있다고 치자. 그 사과를 그릇에 담으라고 했다면, 그리고 그릇이 여러 개가 있다면 쉽다. 양에 차는 그릇을 고르면 될 테니까. 죽도 마찬가지고 라면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드는 그릇에 담아내기만 하면 그 뿐이다. 내용이 형식을 규정하는 간단한 용례다. 사람 몸에 옷을 맞추는 게 당연지사.
그런데! 창작이나 인생은 조금 다르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여행을 간다고 치자. 휴가를 받아서 무슨 기념으로 또는 견문을 넓힐 목적으로 여럿의 산, 바다, 계곡, 관광지를 두고 이것저것 검토한다면 마치 내용에 맞는 형식을 고르는 것 같다. 그런데 정작 기분(내용)에 따라서 선택한 여행인데 여행지(형식)에 지배를 받는다. 내용을 우선하다가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내용물이 끊임없이 변하는 성질을 띠었기 때문이다. 내 기분 따라 형식이 변하지를 않는다. 그런데 형식에 내용을 맞추면 의외로 간단하게 풀린다. 바가지 요금에 밀리는 차량, 붐비는 사람들 어느 것 하나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행지의 형식이 원래 그렇다고 믿고 수용하면 된다. 쉽지는 않겠지만. 내용을 틀에 맞추면 간단하다.
그러면 놀라운 일들이 순식간에 벌어지는데 그 가운데 고무적인 것이 매순간이 행복하다는 것. 또다시 연극을 보자.
캐릭터를 연구 또는 분석해서 인물을 창조하는 것을 캐릭터 빌딩(Character Building)이라고 한다. 인물의 전사(前事)를 상상하고 짐작하면서 점진적으로 배우가 무대에 발을 붙이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것이 내가 보기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스터디를 하는 과정에서 인물의 캐릭터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일순간에 180도 바뀔 때도 있다. 다시 말해서 천천히 쌓아올린 캐릭터를 한방에 무너뜨리는 일이 항다반사다. 속상하기 그지없다. 이럴 때 형식을 우선하는 관점이 빛을 발한다. 거푸집 같은 형식의 틀에다 캐릭터를 넣고 한방에 찍어내는 것이다.
거칠면 거친 대로 엉성하면 엉성한 대로 그날 것은 그날 찍는다. 어차피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매일 새로 찍으면서 진화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기막힌 캐스팅(Casting)이 된다. 다시 말해서 형식에 맞추어 내용을 매일 바꿔나가는 것이 요긴하다.
그렇게 하지 않고 공연 날을 위해서 하나씩 하나씩 와신상담해 가며 완성해 가는 것은 나중에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그 빌딩이 잘못 지어진 설계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가끔 배우들이 아직은 준비가 덜 되어서 그것을 표현할 수가 없으니 나중에 보여주겠다는 - 마치 두괄식이 아닌 미괄식처럼 - 말을 들을 때마다 형식에 그냥 내용을 맞추자고 간단하게 말한다. 우리는 무엇을 짠하고 보여주는 인생을 살 수 없다.
그날그날, 순간순간에 마무리하고 확정을 지어야 한다. 건축물을 설계하는 일도 별 다르지 않다. 크로키로 건축의 형식을 크게 그리면서 시작한다. 나중에 어마어마한 상세설계가 나올 테지만 여하튼 형식 속에서 탄생한다. 어설픈 창작은 대부분 내용을 따라 부화뇌동하면서 망가진다.
비약이 심하지만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때그때 내용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형식을 먼저 만들고 그 틀에 내용을 맞춰 그때그때 살아야 한다. '인생을 멋지게'라는 콘셉트를 가지고 살아야지 이럭저럭 살다보니 '인생이 멋졌어'는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맥베드의 입을 통해 한 말처럼 세상이 무대고 인간이 배우라면 멋진 연기를 펼쳐야 하지 않겠나.
자기만의 스타일과 형식을 고민해보자. 자기에게만 어울리는 그릇이 알라딘의 등잔처럼 어딘가에 숨죽이고 있을 테니. 자! 여러분, 굿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