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원영 (인하대 겸임교수·극단 십년후 대표)
노나라에 한 선비가 살았습니다. 폭풍우가 심하게 몰아치던 어느 날 밤입니다. 젊은 여인이 홀로 사는 이웃집 지붕이 부서졌습니다. 여인이 선비를 찾아와 딱한 사정을 얘기하고는 아침까지만 재워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선비는 거절하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요.

"이렇게 폭우가 쏟아지는데 이만한 청도 들어주지 못하십니까?"

"젊은 남녀가 한밤중에 어떻게 한 방에서 함께 자겠소?"

"무슨 말씀입니까? 옛날 유하혜는 모진 추위에 몸이 언 여인을 안고서 자기 체온으로 녹여 소생케 했다는 말씀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그랬어도 사람들은 칭찬을 했으면 했지, 어느 누구도 그를 호색한 사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공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선비는 유하혜의 정신을 터득했다. 유하혜는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했지만, 그 선비는 도저히 자신이 없는 지라 거절할 수밖에 없었으니, 모두가 자기를 알고 행한 행동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행위를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선택은 각자의 가치관과 철학에 따라 결정됩니다. 문제는 '내'가 선택한 것을 '남'에게 강요할 때 분열이 생기고 증오심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장관 후보자로 추천한 사람에 대해 비난이 거세지자 링컨 대통령이 말합니다.

"한 번은 내가 형과 함께 농장에서 일할 때였지. 나는 말을 몰고 형은 쟁기를 잡고 말이야. 그 말은 아주 게으른 놈이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그날은 열심히 내달리는 게 아닌가. 자세히 살펴보니 녀석의 잔등에 커다란 말파리 한 마리가 붙어 있더군. 말파리를 떼어냈더니 형이 왜 떼어내냐고 말하더군. 말이 아파할까봐 그랬다고 하자, 형은 이렇게 말했지. 그 말파리 덕에 이 게으른 놈의 동작이 빨라진 것이라고 말이야. 만약 지금 윌리엄의 잔등에 '대통령 병'이란 말파리가 딱 달라붙어 그로 하여금 열심히 뛰게 한다면 내가 왜 말파리를 떼어내겠는가?"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링컨의 행위도 말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지만, 형의 행위 역시 경작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형을 통해 훌륭한 리더로서의 깨달음을 얻은 링컨은 미국 역사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1840년 아일랜드에 감자돌림병이 돌았습니다. 이때의 기근으로 약 200만 명이 굶어죽거나 외국으로 탈출하는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감자의 한 가지 품종만을 전국적으로 재배한 것이 기근의 원인이었습니다. 크기가 커서 수익성이 좋은 품종만을 재배했고, 그 결과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작물이란 '나'의 필요를 식물에게 강요한 것입니다. 필요할 때 물과 양분을 주니까 작물은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환경변화와 병균에 매우 취약한 식물로 변하고 맙니다.

붕어빵 같은 획일적인 사고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잃게 합니다. 다양함이 때로는 시끄럽고 무질서한 듯이 보이지만 놀랍게도 그 속에 위기 극복의 힘과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나'의 신념은 나 자신에게만 적용해야 합니다.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할 때 분열과 갈등이 생깁니다. 감자돌림병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다양성은 경쟁력의 원천입니다.

요즘 홍수피해의 책임 소재나 무상급식 사안을 두고 여야의 비난 성명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마치 '누가 옳으냐?'를 두고 싸우는 듯 보입니다. 이런 다툼은 상대를 없애야 할 '적'으로 여기게 하여 끊임없는 정쟁만 일삼게 합니다. 여야는 왼팔과 오른팔과도 같은 관계입니다. 각기 다른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두 팔 모두를 함께 써야 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위기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다름'에 대해 귀를 열고 자신의 역할을 찾을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