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비로소 그 새로 난 길을 이용하게 됐다. 과연 신선하고 아직은 휑한 도로는 그 위를 달리는 사람에게 참으로 아름답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막히지 않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세상이다. 예상했던 시간보다도 훨씬 일찍 도착하게 되니 되레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과연 돈의 위력에 감탄하면서 새로운 도로를 찬양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나 다시금, 끊임없이 세상에 쏟아져 나와 앞으로도 영원히 줄어들지는 않을 것 같은 자동차들이 이 새롭고 아름다운(?) 도로를 삼켜버려 옴짝달싹 못하는 공룡화석으로 만들어버리게 될지 모르겠으나 내게 지금 당장 주어진 30분이라는 시간과 그 시간의 절약이 가져다준 약간의 경제적 이득(?)은 달콤하기 그지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후 그 새 길을 자주 이용하게 되면서 무엇인가 마음속에서 삐죽이 솟아나오는 것이 있었다. 몇 번 이용하다보니 더 이상 그 도로는 나를 그 전보다 더 빨리 목적지에 닿게 한다는 감각도 무뎌질 즈음이었다. 그 30여분은 어디로 간 것이지? 나에게 남았다고 여겨지던 그 시간들은 무엇이 되어 내게 남았다는 말인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만약 그 시간이 내게 정말로 새롭게 주어진 것이었다면 그것은 식사를 하는 시간으로 쓰여진 것인가 아니면 자는 시간으로? 그것도 아니라면 상상하고 창조하는 시간으로 쓰였을까? 그 시간은 이 세상 만물을 위해 쓰여졌을까? 아니면 나만을 위한 시간이 되었을까. 과연 그 시간이 내게 새롭게 주어진 시간이긴 한가 말인가? 결론은 아무리 궁리해도 명쾌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번 시간을 어디에 썼는지 분명하게 찾을 수 없어서이고, 또 다른 이유는 그 이전 도로에서 썼던 시간이 다 헛된 시간이었다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의 시간에 무슨 큰 차이가 있는지도 실은 헷갈린다.
옛날 사람들이 그 거리를 걸어서 가려면 아마도 족히 사나흘이 걸렸을지 모른다. 지금처럼 뚫린 길도 아니요 춤추듯 빙글빙글 돌아가는 길이니 마냥 걷는 길이다. 그들이 그 길에서 보낸 시간은 과연 버려진 시간이었을까? 여름 한낮 소나기를 만나 남의 집 처마 밑이나 큰 나무 밑에서 비를 긋는 시간은 과연 삶의 기간에서 제외시켜야 할 버려진 시간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얘기할 자 있다면 그 자는 모든 시간을 이른바 공장의 생산력만으로 삶의 가치를 재는 사람일 것이다. 혹시 일생 돈을 얼마나 벌고 갔느냐가 인생값의 척도가 아니었으면.
나는 학교에서 밥을 벌어먹고 산다. 일생 시(詩) 썼으니 학교에서도 시를 가르친다. 물론 시는 복합적인 것이어서 생에 대한 균형을 전제하는 것이니 여타의 단순한 기능적이고 직업적인 공부만은 아니다. 요즘 대학에는 강의 평가라는 것이 있다. 학생들이 담당 교과목의 성적을 확인하면서 그 과목과 담당 교수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이다. 거기엔 허심탄회한 자유 발언의 기회도 있다. 헌데 이번 학기 끝에 거기에서 의외의 충격적인 발언을 발견하고는 적잖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기 중에 학생들이 조금씩 지쳐간다고 생각될 즈음, 강변에 나가 야외 수업을 한 적이 있다. 막걸리를 앞에 놓고 사는 이야기, 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것은 내가 학창시절 크게 도움이 된 수업 방식이었다. 창의적인 공부에서 그 시간은 빵을 부풀게 하는 시간으로 비유되곤 한다. 그러나 그 시간을 어떤 학생은 '허비한 시간'이라고 비판하고 있었다.
빵이 부푼다. 빵이 부푸는 시간은 향기롭고 느긋하고 풍요롭다. 그 빵이 부풀면 빵의 부피 속에는 빈 공간이 생긴다. 헛공간이라고 해도 좋다. 그 빵이 맛있고 부드러운 것은 그 부푼 공간들 덕분이다. 빨리 내달리는 도로 위에서의 시간이 창의의 시간일 수 없다. 휘돌아 들고 꺾이는 오솔길의 다양한 얼굴에서 비로소 새로운 창조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시가 익고 문학이 익고 인생이 숙성되려면 책으로만 되지 않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무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실용의 강조는 무용이 넘쳤을 때다. 지금은 실용이 강조될 시간이 아니라 무위가 강조되어야 할 시대가 아닐까? 시를 배우러 온 학생도 혹시 돈 버는 기술을 배우러 온 것으로 착각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