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구슬 (협성대 인문사회과학대학 학장·시인)
국내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뉴욕에서 패션쇼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인체의 곡선에 대한 한국인 특유의 섬세한 이해와 해석을 주무기로 한 한국 디자이너들의 독창적인 행보는 한류열풍에 새로운 불을 지펴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한류열풍이 뜨거운 다른 한 편에는 반(反)한류의 차가운 물결도 거세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류열풍의 중심지 중의 하나였던 일본 도쿄에서 극우파들이 주도하는, 한류 드라마 방영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트위터에서는 반한류를 외치면서 한류 드라마를 비판하는 논쟁이 뜨겁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미묘한 역학적 메커니즘이 작용하고 있기는 하겠지만 이는 우리에게 한류열풍에 대해 반성을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미국과 영국이 세계지도 제작의 표준이 되는 해도(海圖)를 만드는 곳인 국제수로기구(IHO)에 동해(East Sea)를 일본해(Sea of Japan)로 단독 표기하는 것을 지지하는 서한을 제출했다고 한다. 이어 미 국무부는 9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일본해'를 사용한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이 82년간 유지해 온 '일본해' 표기의 기득권을 바꾸기 위해 그간 우리 정부가 제대로 노력해 왔는지 의심하는 눈길이 따가운 화살처럼 쏟아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에게는 18세기 중반 영국 런던에서 발간된 세계지명사전에 동해를 '한국해'(Sea of Corea)로 표기한 중요한 역사적 문헌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기고 난 다음에야 야단스럽게 소동을 벌이는 한국식 대응을 반성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지난 7월 15일 충남대학교에서 열린 국제퇴계학회에 참석한 바 있다. 21세기에 무슨 16세기의 고전적 학자 퇴계인가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필자 역시 퇴계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는 퇴계가 지닌 현대적인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퇴계학 국제학술대회'가 열린 지 30년을 넘기면서 일본, 대만, 미국, 러시아, 독일, 중국, 홍콩 등의 세계적 학자들이 대거 퇴계학에 관심을 가지자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퇴계 사상의 핵심은 일차적으로 우주를 리(理)와 기(氣)라는 두 가지 성질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의 세계로 보는 일원론적 세계관이다. 또한 그의 제자 이굉중이 주자서를 읽으려 하자 "옛날부터 어찌 시서를 공부하지 않은 이학이 있겠느냐"고 한 말에서 드러나듯이 문(文)과 리(理)가 분리될 수 없다는 퇴계의 통합적 사유야말로 객체를 포용하고 타자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에서 소통과 융합이 요구되는 21세기에 신선한 화두가 된다는 것을, 이것이 퇴계학이 지닌 현대적 의의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서구의 인간중심주의적 사유의 폐해를 도처에서 보고 있다.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아 자연을 인간이 마음대로 개발하고 착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이원론적 사유가 쓰나미와 같은 엄청난 자연의 재해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퇴계학의 정수는 무엇보다 겸손에 있다. 광기의 욕망 때문에 남의 것도 자기 것이라 주장하고 억지로 빼앗으려는 폭력적 이기심이 아니라 타자를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관용과 겸양의 자세야말로 분열과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가 배워야 할 덕목이 될 것이다. 퇴계학이 세계적 학문의 하나로 각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일시적이고 시류적인 한바탕 물결에는 범람하는 홍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단지 가시적이고 대중적인 것이 아니라 오래, 깊이 들여다볼수록 진가를 발하는 것일 때 지속적 의미를 지닐 것이다. 30년 이상 동서양 학자들의 관심을 사로잡고, 그 열기를 더해가는 퇴계학의 진수가 이것이다. 동해 표기 문제의 해법도 시끄러운 소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300여 년 전 동해를 '한국해'로 표기한 중요한 역사적 문헌에서 찾아야 할 지도 모른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 뿌리를 찾아 면밀하게 사실을 검토한다면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깊이 들여다볼 때 진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번 홍수에, 즐겨 걸었던 '예술의 전당' 옆 예쁜 오솔길이 다 망가져버렸다. 비 그치고 난 뒤 다시 찾은 그 길에 진흙을 뒤집어쓴 채 작은 풀꽃 하나가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마치 진흙 속에 핀 연꽃같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나태주,「풀꽃」). 동해야, 너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