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후의 인천 체험을 담은 이 회고록에는 인천신사의 제례를 주관하던 궁사(宮詞)였던 이소노(磯野)가 인천신사의 신체(神體) 은닉 과정에 대해 증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소노의 증언에 따르면 인천신사에는 탁구공 크기의 검은 색 옥사리(玉砂利)가 신체로 보관되어 있었는데, 해방 직후인 8월17일 오후 4시에 인천신사의 궁사들과 인천부윤, 부두관리국장이 입회한 가운데 인천 앞바다의 한 지점에 그 신체를 가라앉혔다는 것이다.
인천신사의 신체를 숨긴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그의 증언에 크게 새로운 사실은 없다. 다만 은닉 당시에 입회자가 누구였는지를 밝혔고, '○○지점'이라고만 알려진 장소를 '인천항 앞바다 한 가운데'라고 조금 구체화했을 뿐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숨은 신'의 은닉처에 대해 굳게 함구하고 있는 것은, "언젠가는 다시 신전으로 맞아들일 때를 기다리는 임시조처"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해방 직후에 일본인들이 벌인 소란 중의 하나는 한국에 설치했던 신궁과 신사에 보관된 신체를 숨기는 일이었다. 천상의 최고 신이자 천황의 조상인 아마테라스 오오미가미(天照大神)를 비롯한 제신들의 신체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느라 전전긍긍했다. 실제로 8월15일 저녁 평양 신사를 비롯한 전국 중요 신사에 대한 방화와 파괴가 시작되었다. 신사 건물은 가장 일본적인 건축물이자 잔혹한 식민통치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과 조선은 한 뿌리이며 일체'라는 이른바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조선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만드는 정책을 집중적으로 추진했다. 신사참배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군국주의 표상이었다. 일본인들의 민간신앙이었던 신도(神道)를 국가종교로 둔갑시켜 일본인은 물론 조선인들에게도 강요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총독부는 신사의 건립을 독려하여 1945년 6월까지 전조선에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에 건립된 소규모 신사 1천62곳이 세워졌으며, 각급 학교 등에는 '호안덴(奉安殿)'을 세우고, 각 가정에는 '가미다나(神棚)'라는 가정 신단(神壇)까지 만들어 아침마다 참배하도록 하였다.
현인신인 천황이 항복 선언을 하게 되자, 최고 신 아마테라스도 '숨어야하는' 사태가 온 것이다. 초유의 사태를 맞아 조선총독부와 신궁의 궁사(宮詞)들이 8월16일 대책회의를 하고 작성한 시나리오는 전 조선의 신궁과 신사에 '강림'해 있던 신들을 하늘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이른바 '승신식(昇神式)'을 올리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령은 승신식으로 하늘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신사에 보관하고 있던 신의 상징인 신체가 문제였다. 신체는 신령이 깃든 거울, 구슬, 칼 따위로 참배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다. 총독부에서는 8월16일에서 17일까지 전국의 신사에 승신식을 거행할 것과 중요한 신궁과 신사의 신체는 항공편으로 '봉환'하고 불가능할 경우 적절히 은닉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성의 조선신궁에 보관해 오던 신체인 메이지 천황의 보검만 항공편으로 반납되었을 뿐 대부분의 지방 신사의 신체는 땅속에 파묻었으며, 드물게는 인천의 경우처럼 바다에 던져 넣었다. 애써 '모신' 신들을 하늘나라로 되돌려 보내고 신체를 땅에 파묻는 참으로 기이한 의식이었다.
일제가 '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강요한 신사참배는 처음부터 종교인들을 비롯한 민중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의 교역자와 신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의 참배거부 운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신사참배에 대한 한국인들의 극도의 반감은 해방 직후 대부분의 신사에 대한 방화와 파괴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신앙은 강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벌인 '승신식' 소동이 얼마나 우스꽝스런 일이었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