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진갑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연구실장)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그동안 미루어왔던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를 다녀왔다. 앙코르 와트는 19세기 프랑스 박물관학자가 밀림 속에서 발견한 유적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앙코르 와트로 떠나면서 궁금했던 것은 그 위대했던 문명이 어떻게 한 순간에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는가, 그리고 비록 폐허가 되었겠지만 꽤 큰 도시인데 외국인에게 발견될 때까지 사람이 전혀 살고 있지 않았을까 였다.

앙코르 와트 유적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15세기이다. 앙코르 와트 유적 주인공은 앙코르 왕국이다. 왕국은 9세기부터 15세기 사이에 번창하였으며, 앙코르 왕국의 대표적 유적인 앙코르 와트는 1113년부터 1150년까지 3만명의 기술자가 참여하여 만든 거대한 사원이다. 해자를 포함한 동서의 길이는 1천500m, 남북은 1천300m이며 넓이는 210㏊로 약 198만㎡에 달한다. 사원 주위에 해자가 있어 앙코르 와트 사원은 거대한 저수지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전성기 앙코르 왕국의 인구는 100여만명에 달하였다 한다. 1432년 앙코르 왕국은 이웃한 타이 시암족의 침략을 받았다. 시암 족은 앙코르 왕국의 무희 압사라와 왕국의 신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고, 사원을 포함하여 도시 시설을 철저히 유린하였다. 남아 있던 앙코르 왕국 사람들은 수리 시설이 파괴되어 더 이상 이곳에서 살 수가 없어 앙코르를 떠났고, 앙코르 유적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40여년의 세월이 흘러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침략하던 19세기에 프랑스 박물관학자가 이곳을 찾았다. 이 때 앙코르 유적 주변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프랑스 박물학자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앙코르 와트를 조사한 후 앙코르 와트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프랑스 박물학자가 앙코르 와트를 세상에 알린 것은 맞으나 그가 발견했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디언이 살고 있는 아메리카 대륙을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으로 서술한 세계사 교과서가 생각났다.

앙코르 와트에 대한 의문을 해결한 후 편안한 마음으로 앙코르 와트 사원을 둘러보는데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뱀신 '나가' 조형물이다. '나가'는 머리가 일곱 개 달린 코브라이다. 그런데 얼굴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앙코르 신화 속에 나오는 동물이다. 뱀신 '나가'는 힌두교에서 불사(不死)를 상징하고, 불교에서는 부처 수호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앙코르 와트는 3중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회랑에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의 신상(神像)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상징물이 부조되어 있다. '나가'는 사원 회랑은 물론이고 사원과 바깥세상을 이어주는 다리 난간에도 조각되어 있다. '나가'가 인간의 세계와 피안의 세계인 천상의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원 곳곳에 무희(舞姬) 압사라가 조각되어 있다. 캄보디아 민속춤인 압사라 춤은 손동작이 화려한 춤이다. 그런데 압사라 춤의 동작이 '나가'의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다. 캄보디아 인에게 뱀신 '나가'는 경외로운 존재이다. 캄보디아 건국 신화에도 뱀이 나온다. 인간이 뱀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자손이 캄보디아 인이라는 것이다. 왕이 뱀의 딸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동남아시아를 비롯하여 인도 원주민들은 뱀 숭배 신앙이 있다.

캄보디아 인들에게 뱀은 매우 친숙한 존재이다. 그래서인지 앙코르 와트가 있는 씨엠립 시내 곳곳에서 머리가 일곱 달린 뱀신 '나가'를 만날 수 있었다. 사원 입구에서는 물론이고, 외국인이 드나드는 호텔 입구에도 상징 조형물로 만들어져 있었다. 한국인에게 무섭고도 징그러운 뱀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성스럽고 친근한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앙코르와트와 씨엠립에 며칠 있는 동안 뱀신 '나가' 조형물이 혐오스럽지 않고 하나의 문화적 상징물로 느껴졌다. 성스러움과 혐오스러움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문화 경험의 소산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