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균 (성산효대학원대학교 효학과 교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보다 더 절절한 문장으로 우리나라를 표현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영토의 끝자락 동해와 백두산을 영원토록 하느님이 보우하신다는 이 선언, 이 다짐. 당시 제국주의와 패권주의로 치닫던 일본과 중국에 대한 경계의 말이 아닌가? 언제 어디서 들어도 가슴 뭉클한 가사 내용이다.

하지만 애국가의 작곡가는 알아도 작사자는 아직도 미상이다. 전설속의 5천년 전 단군 할아버지는 알아도 100년 전 애국가의 작사자는 아직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르는 게 아니라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한 나라를 상징하는 국가(國歌)를 만든 장본인을 모른다고 하겠는가! 대한민국 역사의 비극이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해방 후 10년이 되도록 애국가 작사자를 명시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당대 최고의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심의했다. 참석자는 백낙준·이병도·이선근 등 13명으로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석학들이다. 수많은 연구 결과와 자료를 토대로 논의를 거듭하다 표결에 부친 결과, 윤치호 11표 반대 2표. 절대 다수가 윤치호를 지목했다. 하지만 결과는 만장일치가 아니란 명분으로 부결되었고, 그 이후로는 다시 이런 토론을 하지 않았다. 전체주의 국가도 아닌데 만장일치를 고집한 것도 문제지만, 정당한 자료와 문헌을 근거로 애국가 작사자로 윤치호를 지목해 놓고도 그의 친일행적때문에 이를 인정하지 못한 것은 민족적 아픔이자 비극이다.

윤치호설의 근거로는 첫째, 지금의 애국가 가사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노래집 '찬미가'(1908)가 '윤치호 역술(譯述)'이라는 점. 둘째, 미주 신한민보 1910년 9월 21일자에 소개된 윤치호의 '국민가'가 애국가 가사와 일치하는 점. 셋째, 1925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에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가 윤치호 애국가에 부속되어 생겼다"라는 기록이 있는 점 등이다.

김활란이 개성에서 윤치호를 만났을 때 직접 들었다는 육성 증언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애국가를 내가 작사했다고 말하지 마시오. 내가 지은 줄 알면 나를 친일파로 모는 저 사람들이 부르지 않겠다고 할지 모르니까…."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다면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일면적 평가나 선입견에 근거한 단정은 사실에 대한 왜곡을 불러올 수 있고, 사실을 망각시킬 수도 있다. 윤치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흑백 논리로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근대사의 비극은 대개 일제 식민치하때문에 발생한다. 어떠한 행태의 친일 행적도 용납할 수 없다는 민족적 순결주의가 한국 근대사를 반토막으로 만든 것이다. 윤치호도 예외가 아니다.

윤치호, 그의 친일행적이 분명하더라도 애국가 작사자로서의 역사적 사실은 더이상 방치되거나 묻어 두어서는 곤란하다. 그가 비록 친일파로 지목되어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일부 진보 성향의 학자들까지도 "그에게 국가·사회를 생각하는 정신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윤치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애국계몽운동에 뛰어 들은 것이다"(강준만)고 평하는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