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도성 (경기도음악협회 난파연구위원 '홍난파의 집' 운영이사)
오늘(8월 30일)은 서양음악의 선구자 홍난파가 돌아가신 지 70주기가 되는 날이다. 때를 같이 해 우리나라 근대문화유산 90호인 서울 홍파동 '홍난파의 집'에서는 '2011 홍난파 가곡제'가 열렸고,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는 '제43회 난파음악제'가 열린다. 또 홍난파의 딸이 사는 미국에서도 '홍난파 서거 70주년 추모음악회'가 개최돼 성황을 이뤘다. 홍난파가 떠난 지 7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분을 잊지 못하고 기리는 건 그만큼 남긴 영향력이 크고 깊기 때문이다. 홍난파가 남긴 교훈에 대해 추모일 아침에 생각해 보자.

경기도 화성시 활초동에서 태어난 홍난파는 어릴 적 서울로 올라가 서양 선교사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일본과 미국에서 음악공부를 했다. 그분은 일본유학 중 도쿄심포니오케스트라와 도쿄 신교향악단에서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했다. 도쿄 일본대학에서 일본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던 홍난파는 1931년 7월 태평양 건너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분의 유명세는 이미 조국과 일본에 얼마나 널리 알려졌던지 미국 유학을 가는 배안에서 선상독주회를 열기도 했다. 1931년 8월 6일 저녁 8시30분 여객선 1등석 사교실에는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홍난파는 흥사단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시카고 셔우드음악학교(Sherwood Music School)에서 바이올린과 작곡 등을 배우고 음악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3년 귀국하는 길에는 로스앤젤레스에 들러 한인교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으며 제19회 로스앤젤레스 지방 흥사단 대회에도 참가했다.

미국 유학후 식민지 조국에 돌아온 홍난파는 후학 양성과 동시에 다양한 음악활동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인 그분 가르침의 화두는 항상 재능이 아닌 인격이었다. 홍난파는 1935년 9월 제1회 전 조선남녀음악현상경연대회에서 바이올린 심사위원과 대회 심사위원장으로서 "백 명의 입선자를 내는 것보다도 한 사람의 음악가를 얻으려는 것이 본 콩쿠르의 사명이요, 의도임을 깨달아주기를 바라는 바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홍난파는 콩쿠르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음악과 콩쿠르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가져줄 것을 당부하면서 응시자 자신이 음악을 대하는 태도야말로 자신에게 내리는 가장 엄정한 심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음악콩쿠르에 참여하는 응시자들이 인격을 갖춘 참다운 음악인이기를 바란다는 메시지였다. 홍난파는 1938년 9월 개최된 제3회 음악콩쿠르에서도 심사위원 대표를 맡았는데 이때도 그의 가르침은 천재적 예능보다도 인격적인 노력이었다. 음악콩쿠르를 앞두고 신문에 기고한 제목은 '참다운 예술가는 인격을 지켜라'였다. 홍난파는 "음악예술이 인격을 떠나서는 존재 가치나 향훈을 발휘할 수 없음을 잊지 말아 예선과 결선을 불문하고 철두철미 양심적 열연을 기대하는 바이다"라고 강조하였다. 홍난파는 음악콩쿠르에 임하는 응시자가 철저하게 양심적으로 열연해줄 것을 강조하고 또 당부했다. 미국 유학중 교통사고로 다친 후유증으로 늑막염을 앓던 홍난파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된 후 고문을 당해 병이 재발됐고 결국 늑막염이 원인이 되어 44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1941년 8월 30일, 지금부터 정확히 70년 전 해방의 아침을 보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난 홍난파 선생을 추모일 아침에 생각하니 선생이 남긴 참된 교훈이 우리의 마음을 진하게 울린다.